8 min

30. 나무꾼 시인. 정‪봉‬ 조선연예인 비사(祕史)

    • Livros

18세기 접어들면서 학문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중인들이 글을 읽고 노비들이 시를 짓는 일이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여항문인(閭巷文人)이라고 일컬었는데 여항은 일반 여염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항문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아마도 양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모습에 하층민들은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원래부터 글공부를 해야 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과는 달리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었다. 정봉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초부라고 불렸고, 당대 사람들 역시 정 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봉의 원래 신분은 양근,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양반집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신분이 세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모 모두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총명한 머리 덕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마 오다 가다 주인마님이나 도령이 책을 읽는 것을 귀담아 듣다가 바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주인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자기 자식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글 솜씨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으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양근 땅에 사는 나무꾼 시인이라고 알려졌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은거하고 있는 진짜 고수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식이었다. 조수삼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투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외모와 이름, 그리고 출신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주인집에 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글 솜씨가 아까워서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사는 외거노비로 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배 한척을 구해서 양근과 동호(東胡), 그러니까 오늘날 동호대교가 있는 옥수동의 나루터를 오가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연명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한양을 오가게 되면서 정 초부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가 이 시는 아마 땔감을 팔러 오가던 동강의 풍경을 읊은 것이리라

東湖春水璧於籃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白鳥分明見兩三 눈에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楡櫓一聲飛去盡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夕陽山色滿空潭 노을 아래 산 빛깔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이 시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의 그림 위에 쓰는 시문인 화제(畫題)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도화서 화원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가 자신의 그림에 시를 남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지은 시들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거침없이 노래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들은 한양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가 계층을 떠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노론 양반들로 구성된 시회인 동원아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일약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처럼 당대의

18세기 접어들면서 학문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중인들이 글을 읽고 노비들이 시를 짓는 일이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여항문인(閭巷文人)이라고 일컬었는데 여항은 일반 여염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항문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아마도 양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모습에 하층민들은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원래부터 글공부를 해야 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과는 달리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었다. 정봉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초부라고 불렸고, 당대 사람들 역시 정 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봉의 원래 신분은 양근,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양반집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신분이 세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모 모두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총명한 머리 덕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마 오다 가다 주인마님이나 도령이 책을 읽는 것을 귀담아 듣다가 바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주인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자기 자식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글 솜씨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으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양근 땅에 사는 나무꾼 시인이라고 알려졌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은거하고 있는 진짜 고수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식이었다. 조수삼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투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외모와 이름, 그리고 출신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주인집에 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글 솜씨가 아까워서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사는 외거노비로 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배 한척을 구해서 양근과 동호(東胡), 그러니까 오늘날 동호대교가 있는 옥수동의 나루터를 오가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연명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한양을 오가게 되면서 정 초부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가 이 시는 아마 땔감을 팔러 오가던 동강의 풍경을 읊은 것이리라

東湖春水璧於籃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白鳥分明見兩三 눈에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楡櫓一聲飛去盡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夕陽山色滿空潭 노을 아래 산 빛깔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이 시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의 그림 위에 쓰는 시문인 화제(畫題)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도화서 화원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가 자신의 그림에 시를 남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지은 시들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거침없이 노래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들은 한양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가 계층을 떠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노론 양반들로 구성된 시회인 동원아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일약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처럼 당대의

8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