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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나는 종놈이로소이다. 이단‪전‬ 조선연예인 비사(祕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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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단전(李亶佃), 즉 진실로(亶), 밭을 가는 놈(佃)이라는 뜻인데 설마 부모가 지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리고 필재(疋漢)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의미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래 하(下)자와 사람 인(人)자를 파자해서 필(疋)자로 정했습니다.”
뒤에 붙은 한은 보통 천한 남자를 지칭하는 상놈이라는 뜻의 상한(常漢)에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을 호는 하인 놈, 혹은 아랫것이라는 뜻이다. 괴상한 이름에 아랫사람을 지칭하는 호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패랭이라고 불리는 평량자를 늘 쓰고 다녀서 이단전 대신 이평량이라고도 불렸다. 연안 이씨 집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양반집 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도 되어있다. 전자가 맞 다고 해도 아마 몰락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돈을 모으면 양반신분을 사거나 양반 행세를 하던 시대에 일종의 역주행을 한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삐딱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시’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를 짓는 솜씨하나만큼은 글공부를 한 양반 뺨을 칠 정도였다.

洞葉蕭蕭下 마을의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溪雲寂寂生 시냇가의 구름이 조용히 일어나네.

짤막한 그의 시를 보면 과장되고 부풀어 올린 것이 아닌 서정적이면서 차분한 감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신 갑자기 방문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곤 했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도 그의 방문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선비 심노숭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는 이단전을 천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규장각의 사검서와 절친하게 지냈다고 설명한다. 사검서는 서얼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백탑파의 핵심인물이다. 이들과 친했다면 아마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까지 역임했던 남공철이 그를 통해 최북과 만났는데 이것을 보면 최북은 물론 남공철 같은 양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재기발랄한 그의 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하인이라는 뜻의 이름과 호를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항거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없이 궁금하다. 이단전은 항상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시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병에 걸려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노숭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운 최후에 대해서 짤막하게 남겨 놨다. 중인들이 주축이 된 여항문인들이 시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시를 짓고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통청운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도 양반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특정 계층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

그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단전(李亶佃), 즉 진실로(亶), 밭을 가는 놈(佃)이라는 뜻인데 설마 부모가 지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리고 필재(疋漢)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의미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래 하(下)자와 사람 인(人)자를 파자해서 필(疋)자로 정했습니다.”
뒤에 붙은 한은 보통 천한 남자를 지칭하는 상놈이라는 뜻의 상한(常漢)에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을 호는 하인 놈, 혹은 아랫것이라는 뜻이다. 괴상한 이름에 아랫사람을 지칭하는 호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패랭이라고 불리는 평량자를 늘 쓰고 다녀서 이단전 대신 이평량이라고도 불렸다. 연안 이씨 집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양반집 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도 되어있다. 전자가 맞 다고 해도 아마 몰락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돈을 모으면 양반신분을 사거나 양반 행세를 하던 시대에 일종의 역주행을 한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삐딱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시’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를 짓는 솜씨하나만큼은 글공부를 한 양반 뺨을 칠 정도였다.

洞葉蕭蕭下 마을의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溪雲寂寂生 시냇가의 구름이 조용히 일어나네.

짤막한 그의 시를 보면 과장되고 부풀어 올린 것이 아닌 서정적이면서 차분한 감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신 갑자기 방문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곤 했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도 그의 방문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선비 심노숭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는 이단전을 천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규장각의 사검서와 절친하게 지냈다고 설명한다. 사검서는 서얼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백탑파의 핵심인물이다. 이들과 친했다면 아마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까지 역임했던 남공철이 그를 통해 최북과 만났는데 이것을 보면 최북은 물론 남공철 같은 양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재기발랄한 그의 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하인이라는 뜻의 이름과 호를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항거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없이 궁금하다. 이단전은 항상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시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병에 걸려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노숭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운 최후에 대해서 짤막하게 남겨 놨다. 중인들이 주축이 된 여항문인들이 시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시를 짓고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통청운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도 양반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특정 계층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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