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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CBS

    • Religion et spiritual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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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3] 대미 - 교회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09/13] 대미 - 교회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교회사 인식은 신학교에서 시작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세계교회사를 배우지만 사실은 유럽교회사 특히 서유럽교회사에 편중되어 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사는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유럽과 북미가 세계 역사를 구성해 왔으나 이제는 달라졌고 교회사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호주를 포함하는 역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교의 역사로 볼 때 19세기 서양의 기독교는 세계 보편적 기독교가 되어 복음을 주고 받았으나 여전히 북미와 유럽 중심 기독교가 잔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미와 유럽교회는 쇠퇴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는 도약하여 기독교의 중심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진 상황입니다. 지난 1963년 몬트리올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사 연구가 북미와 유럽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논의했고 1970년 신학자 피셔는 전세계 다양한 교회들이 우주적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1981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다양한 모습과 역사를 지닌 세계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논의했습니다.

    아시아 교회의 경우 1960년대까지 유럽 중심 교회사 연구에 머물러 있었으나 60년대 중반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 교회가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사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80년대 들면서 인도교회가 자기 중심의 역사 관점 갖기에 노력하면서 아시아 교회 역사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연구

    제1세대 연구로는 1927년 작성되고 1929년 출간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역사연구가 한국교회사연구의 효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선교사들이 서구중심연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2세대 연구는 우리 주체적 역사 인식에서 비롯되어 민족관점, 민중사관, 수용사관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신앙적으로 구속사 관점에서 한국역사를 바라본 것입니다.

    제3세대 연구는 장신대 임희국교수 등이 중심된 것으로 글로벌 시대에 지역사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강자 독식의 역사인식에서 약자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근대 아시아지역은 정치적 독립 이후 갱신과 성숙이 과제를 떠안고 있었고 아프리카지역은 미완의 경제적 독립으로 인한 숙제를 지고 있었으며 서양국가들은 문화적으로 패미니즘과 흑인인권운동에 맞닥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웅과 엘리트 중심의 역사를 반성하고 남성극복과 저변으로부터의 역사연구, 보통사람 중심의 역사연구 방법이 제시되었고 70~90년대 들어서며 인간중심의 역사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 관계하는 역사로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20세기 후반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활자문명이 영상문명

    • 54 min
    [09/0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6

    [09/0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6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발견하였으며 취리히대학에 머물며 경제윤리학자로 그리고 학문의 실천가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에 주목했는데 츠빙글리는 두 개의 법 또는 두 개의 의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 정의의 기초와 목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있으며 특히 산상수훈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죄의 용서가 필수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의 계명이고 속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정의는 겉에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구분은 되지만 결코 나눌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책속에만 머물 뿐 삶의 책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정의를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부단히 추구해야만 하는데 인간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은 정부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당시 경제현실 가운데 이자율과 관련해서 인간은 모든 재물의 청지기일 뿐이므로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적 대안으로 5%의 이자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 그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하고 그에 따라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어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을 아르투어 리히가 20세기 들어 재발견하였고 이를 기초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 윤리를 모색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사회윤리에 기초한 아르투어 리히의 경제질서구상

    1989년 유럽의 동구권이 몰락하여 시장경제질서에 종속되자 냉전질서는 종식되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도래했고 정치.이데올로기는 경제중심시대로 이관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다시 발견한 리히는 시장경제질서만이 존속하는 시점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세울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 츠빙글리 사상에 기초한 실천 가능한 경제윤리를 모색하고 추구했습니다. 당시 동구권은 서구와 같은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경제욕구가 상승하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시장이 확대되었고, 서유럽은 이런 움직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새로운 시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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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30]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5

    [08/30]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5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정법원제도를 신설해서 법률상담과 일상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고 경우를 따져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변혁의 큰 이슈는 농민들의 조세제도 개혁 요구였습니다.

    취리히의 교회가 새롭게 바뀌고 사회도 변혁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이자율을 조정하고 소출세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라는 글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를 수용하지 못한 농민들과 수렵인들은 1522년 반기를 들고 시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츠빙글리를 비판하며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취리히를 떠나 재세례파를 결성하였습니다.

    스위스 전역으로 확산된 종교개혁

    바덴의 공개토론회와 스위스연방공동체의 분열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스위스연방공동체를 향해 번져나가게 되자 스위스 연방 지역대표자회의는 1522년 츠빙글리는 위험한 선동자로 지목하여 위험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대표자회의는 1526년 바덴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때 취리히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카톨릭교회 측에서 요하네스 에크 그리고 개혁교회 측에서 외콜람파디우스가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으로 기존 가톨릭교회 중심의 전통적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는 고립상황에 처해 고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벨과 베른이 취리히의 개혁을 지지하면 나섰고 훗날 제네바의 개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베른의 종교개혁

    베른의 군사적으로 강력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과 토호세력이 베른을 장악하고 있어 취리의 개혁 배경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베른이 개혁은 예술과 문화를 통한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성직자의 부패와 모순, 부패, 용병제 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며 비판하였고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527년에 이르러 의회가 강력해지면서 전통 귀족 중심의 도시가 의회중심으로 바뀌었으며 1528년 1월 의회중심의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츠빙글리의 영향 하에 진행되어 교회관과 성경의 권위, 미사, 성자 숭배, 성화, 성직자 결혼 등을 다루어 미사의 폐지와 성화 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제부터 베른은 취리히의 뒤를 따라 교회개혁을 시작했고 이러한 결정은 스위스연방공동체이 세력 다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취리히는 연방공동체 전역으로 개혁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와 베른 그리고 바젤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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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23]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4

    [08/23]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4

    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잔류재산은 시당국에 귀속하기로 하고 환자와 나그네 돌봄 그리고 복지사업, 교육 등은 시 당국이 맡으며 교회는 신앙문제에 전담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시민사회 성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의 개혁 작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취리히 사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2차 공개신앙토론회

    새롭게 개혁된 취리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혁과정 중 교회의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토론회가 소집되었는데 1523년 10월 26일부터 사흘간 350여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체 연방에서 일반시민 등 9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의제는 성화와 미사였는데 한시적으로 성화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 시의회는 중도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의 토론회를 통해 츠빙글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중세교회는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즉 사순절 금식 전통은 차츰 소멸되었고 중세교회의 미사는 예배로 바뀌었으며 취리히 시는 완전히 종교개혁도시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세력인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노출신인 이들은 10%의 소작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이를 5% 내외로 조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니 농민들은 완벽한 자치권과 독립권 그리고 농지 소유를 요청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노에서 동등한 관계로 신분변화를 제시했으나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완벽한 폐지와 교회재산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며 결국 독자노선을 택하여 재세례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취리히 개혁 교회

    1. 예배개혁

    개혁된 교회는 미사를 설교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으나 1년에 네 차례 시행되었고 성찬기는 화려하지 않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하고 말씀 집중을 위해 악기 연주도 금지했습니다.

    2. 새로운 체제

    츠빙글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가 행정당국의 감독을 받되 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여 임대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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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3

    [08/1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3

    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1551년 츠빙글리는 뮌스터교회를 이끌어 가는 24명의 수사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목회자와 감독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자신의 교회개혁 의지와 구상이 지지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는 ´권위 문제‘에 부딪혀 기존 교회의 제도와 공의회, 교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인문주의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이들의 노선과 달리 츠빙글리는 기존 교회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성경 즉 하나님 말씀만을 새로운 권위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 개혁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때 츠빙글리는 성경주석을 통해 설교로 이어지는 과정을 가르치는 선지학교 즉 목회자 양성학교인 프로페찰을 신설하였고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취리히 상황

    그로스뮌스터 교회에 행해진 츠빙글리의 강해설교에 영향을 받은 청중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즉 마리아 상과 그에 대한 숭배, 성자숭배, 수도원 부패, 성직자의 독신제도 등을 공개 비판하였고 그 가운데 당시 가톨릭교회 영향으로 사회제도로 정착된 사순절 금식과 고기 취식 금지 등 경건운동의 율법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규례를 깨뜨리려 했습니다. 즉 1522년 3월 열 두 명이 출판업자의 집에 모여 의도적으로 소시지를 먹었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여러 곳에서 소시지 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중 고기취식을 죄로 여겨 이를 처벌할 성경적 근거는 없으나 기존의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다만 공공질서를 파괴하거나 여러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즉 사순절 기간 중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이나 공공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금식규례는 교회를 떠나 사회적 쟁점이 되어 시의회 사안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시의회는 그로스뮌스터교회 상임위원회에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을 의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며 갑작스럽게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견해를 밝혔고 취리히의 성직자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콘스탄츠주교가 특사를 파견하여 협의한 결과 한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아 금식규례를 지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교회의 권위가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이 말씀과 충돌하는 사건이었으며 츠빙글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전통인 교부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참된 권위이며 따라서 마리아 숭배와 마리아의 중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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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09]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2

    [08/09]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2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거나 추인해 왔으나 14세기 이후 전사 계급으로 자리 잡았고 부르군도 전쟁에서 타국 제후 대신 싸워주며 그 군사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에서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1494년 이탈리아가 유럽의 전장이 되자 프랑스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조도 참전했는데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프랑스를 이탈해 상대진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고 다시 급여를 받은 일부 용병이 프랑스 진영에 복귀하면서 용병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1503년 스위스연방공동체는 외국과 용병계약을 하려면 모든 연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만장일치로 체결하였으나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용병에 대한 글 발표

    1510년 츠빙글리는 스위스 외교정책과 용병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힙니다. 여기서 그는 어느 편이든 용병이 되어 치르는 전쟁을 반대하며 굳이 용병이 되려면 교황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용병은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그는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을 매년 교황청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1513년 노바라 전투에 참여하고 1515년 글라루스 군사 500여 명이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글라루스에서는 프랑스 편을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츠빙글리의 교황지지가 설득력을 잃었고 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용병제도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점차 평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갔고 그로 인해 평화를 외치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에 주목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아인쩨델른의 츠빙글리

    1516년 교황지지자인 츠빙글리는 정치적 이유로 인찌델른으로 인사조처를 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여간 전적으로 목회에 열중하며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치중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철학과 고대 교부들에 관해 연구하고 무엇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동조해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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