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북스-진설병-완결

들풀북스

방언, 성경 용어 설명과 성경 본문을 풀어 이야기하는 방송

  1. 10/05/2018

    10.믿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기독론)4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한 가지는 예정론입니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심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유의지입니다. 구원 받음은 인간의 선택적인 자유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 받음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전인격적인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영역까지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반면에 자유의지는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할 때에,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의 의지는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선택의 의지는 인간 자신에게 남겨져 있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주장의 견해를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만, 구원을 얻는 의지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요한 웨슬레의 견해를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처음에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했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나누었습니다. 이 방법의 적용 대상이 되었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들에게만 먼저 율법을 주심으로 희생제물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실천하신 경우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의 제물 되심과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서도 앞에서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서는,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게 됨으로 하나님과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격 즉, 계약이 파기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희생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오직 이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다고 나누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구원인데, 유대인들에게도 믿음으로, 또한 유대인들이 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얻음에 있어서 어떤 차별도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오늘 나눌 말씀은 이방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는 아무나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을 본 인간은 죽을 수 밖에는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율법을 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법입니다. 희생의 제물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지만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전체 내용을 요약할 때, 하나님의 선행적인 부르심이라고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먼저 부르시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스스로 올 수 있는 죄인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에스더서에 있는 말씀으로 나누었습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갈 때에도 비록 총애를 받는 왕비이었다 할지라도 왕의 부름이 있은 후에나 나아 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름 없이 나아가다가는 왕의 호위병에게 죽음을 당하기 때문입니다.ㄷ 에 4: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세상의 왕 앞에 나아갈 때에도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부름의 증표도 없이 나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는 오늘 나누는 말씀에서, 성령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기능입니다. 이를 은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먼저 부르심에 대한 성령의 표식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령의 표식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내용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구분 지어야만 합니다. 이때의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미 믿기 전에도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심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부름도 없고, 부르심의 증거도 없이 죄인인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께 나아왔다는 결론을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처음 부르심의 초대장 혹은 초청장이 바로, 성령의 표식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값비싼 공연표를 주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 티켓은 공연관람을 할 수 있다는 표식이지, 공연을 봤다는 표식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며, 자신의 결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령을 주셨다는 의미를 오해해서 믿음의 증표로 주셨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의 특별한 기능들을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해석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때의 성령은 모든 사람 안에 표식으로 내주하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와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과는 구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성령의 특별한 기능인 은사와 같은 것은, 믿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이며, 믿음 그 후에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성령 하나님은 임재하여 계십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사가 아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입장권과 같은 또는 부름의 초대장으로서의 성령의 표식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요엘서의 말씀에서 생각하도록 합니다. 욜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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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9/26/2018

    9.믿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기독론)3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제물의 피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희생제물과 집례자인 제사장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희생제물과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면서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음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구원교리입니다. 교리란 중요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단 번에 용서하신 예수님의 구원완성을 나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물의 피는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습니다. 이 시제로 나누어 본다면, 완료가 됩니다. 앞으로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를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시며 불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칭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속의 값이 되어 지불됨으로 우리를 죄가 없다고 인정하시며 부르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죄를 짓고 있는데 의로울 수 있느냐는 자신의 생각입니다. 지금 성경의 말씀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이지,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알아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에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도 가능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는 전혀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은 현재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현재라는 시간개념 안에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재적 용서는 인간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는 시간이 되므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단 번에 용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구분하자면, 아담과 하와의 죄의 유전으로부터 오는 원죄가 있고, 이에 대한 스스로 죄를 범하는 자법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들의 구분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 개인의 원죄와 자범죄 모두를 합해서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지만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야지만 올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모세까지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나아갔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나오고 싶어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택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께 나올 때에는 희생의 제사 제물을 반드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피로 인하여 죄인은 용서를 확인받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드려지지 않는 제사, 더 이상은 필요 없는 희생 제물의 피가 없는 상황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온 인류의 죄를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교해 보면,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지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조건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며 섭리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원죄와 자범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완전히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을 믿을 때에 구원의 믿음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요구는 이전에 선택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모두에게 동등하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았던 민족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시간은 이미 만료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이방인인 우리 모두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조건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누구는 어떤 나쁜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라든지, 혹은 누구는 이런 죄를 행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분량은 우리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 봉사, 선교, 헌신적인 행동, 헌물 등등으로 구원이 보충되는 것도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이런 일들을 해야지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듯한 이야기는 모두가 사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나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고, 나는 구원을 온전히 받는다는 믿음뿐 입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다음 시간에는 세상 모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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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09/15/2018

    8.믿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기독론)2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의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가 3장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영원한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에서의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구원하신 계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말합니다. 구속사라는 것은 구속을 하시는 역사적인 과정입니다. 그 역사적인 과정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남기셔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에 대한 정확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의 완성을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것이며, 역사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죄용서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창조주의 명령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평가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던 아담과 하와는, 이것이 이렇게 큰 죄가 될 줄을 전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에서, 이 정도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판단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원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성경은 우리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아닌,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분명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기준이 없는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가장 완벽한 기준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전제는 조건이 아닙니다. 이는 절대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기록은 잡음이 섞일 수 없는 옹골진 진리만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고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되어질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며, 우리는 판단의 기준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 안에서 과거에 창조주로 계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일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우리는, 절대 진리라는 출발선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은,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생물의 피로써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우리에게도 있을 수있고, 하나님께도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정은 하나님의 결정이어야만 합니다. 온 우주는 모두 그의 피조물이며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죄가 없는 짐승의 피로 대신 죄의 값을 치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만의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택하시고,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구속의 제사법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양과 소와 염소와 비둘기의 피 흘림이 있을 때에만이 속죄가 되도록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인간의 죄를 결코 값없이 용서되는 것이 아닌, 죄가 없는 희생의 제물의 피 흘림이 죄의 값을 대신 치루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속적을 내고 구원했다는 단어의 뜻입니다. 값이 없다는 것은, 값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 너무나 고귀한 값이기 때문에 값을 인간의 기준에서 셈할 수 없다는 것이지, 공짜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제물의 피 흘림의 값이 나의 죄의 값으로 대신 지불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이 아닌, 영원하신 그리고 완전하신 희생의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지금 온 인류의 죄가 용서된 것은 거저 혹은 공짜로 된 것이 아닌, 인간으로써는 값을 지불할 수 없고, 계산조차도 할 수 없는 고귀한 값이기에 값을 받지 않기로 하셨다는 뜻이지, 죄를 지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데도 값없이 혹은 공짜로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요. 첫째, 죄를 지은 인간을 구해내는 방법은 하나님만이 정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혀 죄가 없는 희생 제물의 피를 죄를 지은 인간의 죄 값으로 대신 받으시겠다는 계획을 명령하셨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셋째, 죄를 지은 인간을 다시 회복하고 구원하는데 하나님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값으로 대신 받으셨습니다. 원인은, 인간은 그만한 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과 가치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의 생명인 피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값으로 지불되면서, 대신 인간은 그 희생 제물의 피의 값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된 것입니다. 결코 값없는 구속이 아닌, 가장 값지고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죄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넷째,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의지 그리고 계획으로 확정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에 따라 희생 제사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믿음의 법에 대해서 계속 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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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08/10/2018

    5.믿음의 기초-십일조2

    오늘은 헌물에 관한 두번째 시간이죠. 지난 시간에 나눴던 말씀에서 십일조의 시작을 볼 때에 십분의 일이라는 개념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왔고, 야곱에 의해서 그것이 실천되어지게 됐는데,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게 된 동기는, '나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나에게 무엇, 무엇을 조건으로 해주신다면 내가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는 모든 여정의 길에 나와 함께하심에 대한 증거와 거기에 대한 감사로 드린 것이 바로 야곱이 드린 십일조의 개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여기는 저의 공간이기 때문에 비교적 말을 세게 할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음에 대해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야곱이 드린 그 십일조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이방인이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율법 조항을 이행할 의무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말자라고 예루살렘 모교회가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십일조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가 감사의 증표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데 '꼭 십의 일조여야만 하느냐' 우리는 거기에 대하여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의 기준점은 얼만큼 되어야 하느냐' 생각할 때, 그 기준점에 대해 보편적으로 십분의 일이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신약시대에서 가난한 과부는 성전에서 자기 모든 생활비를 다 드렸습니다.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십을 드린 건데 하나님은 받으셨죠. 가난한 과부가 십의 십을 드려도,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십의 일을 드려도 그 헌물에 대해 그대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마음의 중심을 그 다음으로 기록한 것이죠. 가난한 과부는 부자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하나님은 평가하셨다는 것이지, 반드시 십의 일을 수치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실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정성의 표시가, 그냥 드려도 아깝지 않은 만큼이라면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분량이 조금 멈칫할 정도가 되어야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며 드린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반 생활비로 이 백이 드는데, 천을 번다고 한다면, 천에서 십의 일조인 백을 내는 건 사실 생활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죠. 생활비가 이 백이 드는데 백을 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십의 일조라는 것은 엄청난 부담감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십의 일을 드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리는 십의 일이 똑같다 할 지라도 그 내는 사람의 부담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 잘 이해하시겠습니까? 십의 일을 요구하는 것은 그 십의 일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적은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해야지만 드릴수 있고, 그리고 그 드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 둘째 아이가 한 두살 됐을 때, 뭘 먹고 있는데 제가 자꾸 한입만 달라고 했죠. 맛있는데 조금밖에 없는 걸 아빠가 자꾸 달라고 하고, 주긴 해야겠는데 너무 아깝고 부담되고, 하지만 아빠에게 줘야지 뭔가 또 나올 것 같긴 하고... 그러니까 과자 같은 걸 반으로 잘라서 양 손에 들고 있다가 저한테 주기 전에 한 손의 남은 과자를 한 입 더 먹고 줘요. 저는 좋아라 하고 먹죠. 그런데 먹으면서도 기쁩니다. 부담된다고 안 주는게 아니라 부담이 되어도 자기가 줄 수 있는 조그만 최선이라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저는 너무나 기쁜 겁니다. 하나님의 받으심도 그렇습니다. 십의 일조를 내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내는 그 마음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른 비는 보통 10~11월경에 내린다고 합니다. 이 때 젖은 땅을 기경해서 보리를 심게 되면 그 다음해 3~4월이 되어 추수를 하게 되는데, 그 때가 무교절과 유월절입니다. 그 다음으로 12월에서 3월 사이에 비를 맞으면서 다시 밀을 심습니다. 그 밀은 유월절이 지난 50일 후에 본격적으로 추수를 하게 되는데 그 때가 바로 맥추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보리로, 맥추절에는 밀로, 자기가 땅에서 얻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죠. 그 다음에 수장절이 9~10월 사이에 있는데 그 때는 여름 과일들을 말려서 양식으로 쓰려고 곳간에 쌓아둘 때 과실들과 남은 것들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 입니다. 그래서 이 세 번의 절기들은 모두 추수와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지금 살 수 있도록 너무너무 크신 하나님께서 이 작고 연약한 나를 돌아보셨습니다'라는 증거로, 그를 두려워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소득을 얻은 그 땅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기의 제사를 드리고 돌아와 자기 집의 모든 가족과 더불어서 남은 양식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절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요구하게 되는 동기가 바로 농산물 추수기와 맞물려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활속에서 생활비를 가지고 한달 생활을 하죠. 그래서 우리는 그 생활하는 금액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근데 사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정 분량이 나간다는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쁜일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내게 남은 십분의 구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나를 지키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마음과 정신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십 분의 일 뿐만 아니라 십 분의 오를 드려도 괜찮고, 십 분의 구를 드리고 내가 일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십의 일을 드리고선 도저히 살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면 이십분의 일을 드려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적으나마 이십분의 일의 나머지 부분을 가지고 또 생활비에 보태서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의 더 큰 분량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9절~13절에 보면, 하나님께만 드리고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예수님의 실제적인 책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3 장 23절에 보면 마가복음에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만 드리고, 일부러 부모를 부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또 하나님께 드림은 의무지만 또 부모도 부양해야되는데 이 양쪽을 다 감당하기에 버거운 사람이 있죠. 그 때는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십일조는 드리고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만큼 그 분량을 놓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만큼 그 분량을 내가 버거울 정도로 준비를 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그것이 바른 예물의 드림입니다. 무조건 십의 일을 다 드린다고 해서, 내가 행해야 될 삶의 의무들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다 옳은 건 아닙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 부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율법 조항에 대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좀 다르겠죠. 우리에게 있어서는 조금 더 생각의 여유를 두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을 두려워하며 섬깁니다.' 이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헌물을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헌물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가지고 오는데 그 마음의 중심이 따라오지 않아서 '나는 너희가 가져온 번제로 살라낸 연기에 내 코에서 진이 날 뿐이다. 너희 마음이 부딪혀오지 않기에 나는 받을 수가 없구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십의 일조 그 수치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드리는 경배자의 마음 중심을 받고 있다는 건 동일하게 흐르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될 것은 이것을 생각해야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헌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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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07/30/2018

    4.믿음의 기초-십일조1

    이번에 같이 나눌 말씀은 헌물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헌물은 중요한 의미가 있죠. 성경 말씀에 직접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이번에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한국에 갔을 때 곧 사회인이 되는 한 청년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는데 청년으로서 고민되는 부분이고, 또한 예민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같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헌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또한 어떠한 자세입니까? 그다음 부수적으로 나눌 내용은, 헌물을 어디에다 하십니까? 이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저도 아주 조심스럽게 전하는데요, 아무튼 이곳은 저의 영역이고 공간이기 때문에 제가 책임감 있는 마음으로 대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헌물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죠. 가장 먼저 십일조, 감사헌금, 생일, 입학, 취업, 돌, 백일, 임직감사헌금, 여러종류의 꽃꽂이 헌금, 떡헌금 등 여러가지 헌물들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헌물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하는지, 교회에서 시키니까 하는 것인지, 거기에는 분명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먼저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첫 번째로 나와 있는 건 아브라함 때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있는 여러 왕들에 의해 잡히게 됩니다. 그를 구원해내면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전쟁의 승리에 대한 대가로 십일조를 드리게 됩니다.   두 번째로 드려지게 된 게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하란으로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아 달아나는 상황에서 잠을 자는데 하늘에 닿는 사다리 꿈을 꾸죠. 꿈을 꾸고 난 이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나의 길과 여정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바로 앞에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서’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증거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십일조, 또한 모든 헌물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 그분이 내게 역사하신다, 그분이 내 삶에 간섭하신다, 나와 그분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라는 그 증거, 증표로 드리는 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함께하셔서 나를 지켜주시므로 감사합니다’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엉뚱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면 받는 걸로, 십 분의 일을 드렸기 때문에 십 분의 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본 분들 중에, 주재원으로 해외에 나와 계시는 분인데, 한국에 돌아가실 때가 되어 연말정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십일조를 미리 먼저 내겠다고, 거기에 대한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헌금한 것에 대한 세금 공제를 받겠다는 거죠. 그건 헌물에 대한 기본 자세도 아니며, 제가 성경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가당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습니다.   신명기 16장 16절에 보면, 너희 가운데 있는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화와께 오는데 빈손으로 오지 말고 헌물을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12:6, 11, 21절에 보면, 여호와의 명하신 곳, 자기 이름을 두신 곳에 와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구요, 민수기서 18장 24, 26, 28절에 보면 십일조의 사용용도가 나와 있습니다.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자손은 원래 땅의 기업이 없거든요. 이 땅의 기업을 대신해서 헌물로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서 27장 32절에 보면 소와 양의 십일조가 나오고, 27장 30절에서는 땅의 곡식의 십일조와 과실의 십일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십일조에 대한 요구를 명시화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당연히 이 말씀에 따라서 십일조를 해야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근데 십일조에 대한 절대적 요구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적으로 요구하셨던 것이고,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율법의 조항을 준수할 절대적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내 확신의 증표, 하나님께서 내게 이 모든 삶을 누리게 하셨다는 여김에 대한 표로 드리는 십일조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적 요구의 십일조는 사실 의무감이 없습니다. 이 부분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내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미 우리는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의 조건들을 다 받았습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복의 조건이 아닐 뿐이지, 이미 우리는 받을 수 있는 복을 다 받았고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십일조는 그에 대한 감사의 증거로 확인시켜드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내용을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신앙이 바람직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율법을 들었고, 율법에 대한 실천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간 3년 후부터 지켜지게 되는데요, 그 내용에 관해서, 또 절기에 관해서 짚어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드렸던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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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성경 용어 설명과 성경 본문을 풀어 이야기하는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