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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2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 Religión y espiritualidad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거나 추인해 왔으나 14세기 이후 전사 계급으로 자리 잡았고 부르군도 전쟁에서 타국 제후 대신 싸워주며 그 군사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에서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1494년 이탈리아가 유럽의 전장이 되자 프랑스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조도 참전했는데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프랑스를 이탈해 상대진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고 다시 급여를 받은 일부 용병이 프랑스 진영에 복귀하면서 용병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1503년 스위스연방공동체는 외국과 용병계약을 하려면 모든 연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만장일치로 체결하였으나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용병에 대한 글 발표

1510년 츠빙글리는 스위스 외교정책과 용병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힙니다. 여기서 그는 어느 편이든 용병이 되어 치르는 전쟁을 반대하며 굳이 용병이 되려면 교황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용병은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그는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을 매년 교황청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1513년 노바라 전투에 참여하고 1515년 글라루스 군사 500여 명이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글라루스에서는 프랑스 편을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츠빙글리의 교황지지가 설득력을 잃었고 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용병제도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점차 평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갔고 그로 인해 평화를 외치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에 주목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아인쩨델른의 츠빙글리

1516년 교황지지자인 츠빙글리는 정치적 이유로 인찌델른으로 인사조처를 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여간 전적으로 목회에 열중하며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치중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철학과 고대 교부들에 관해 연구하고 무엇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동조해 원전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거나 추인해 왔으나 14세기 이후 전사 계급으로 자리 잡았고 부르군도 전쟁에서 타국 제후 대신 싸워주며 그 군사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에서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1494년 이탈리아가 유럽의 전장이 되자 프랑스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조도 참전했는데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프랑스를 이탈해 상대진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고 다시 급여를 받은 일부 용병이 프랑스 진영에 복귀하면서 용병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1503년 스위스연방공동체는 외국과 용병계약을 하려면 모든 연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만장일치로 체결하였으나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용병에 대한 글 발표

1510년 츠빙글리는 스위스 외교정책과 용병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힙니다. 여기서 그는 어느 편이든 용병이 되어 치르는 전쟁을 반대하며 굳이 용병이 되려면 교황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용병은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그는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을 매년 교황청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1513년 노바라 전투에 참여하고 1515년 글라루스 군사 500여 명이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글라루스에서는 프랑스 편을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츠빙글리의 교황지지가 설득력을 잃었고 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용병제도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점차 평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갔고 그로 인해 평화를 외치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에 주목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아인쩨델른의 츠빙글리

1516년 교황지지자인 츠빙글리는 정치적 이유로 인찌델른으로 인사조처를 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여간 전적으로 목회에 열중하며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치중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철학과 고대 교부들에 관해 연구하고 무엇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동조해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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