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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에피소드는 유료 컨텐츠로 팟빵앱을 통해 결제 후 청취 가능합니다‪.‬ [두철수]두 남자의 철학 수다

    • Philosophy

“때는 바야흐로 자유주의의 물꼬가 트이는 시기였다.”
-방송 중에서

앞서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
‘똘레랑스의 창시자’ 피에르 베일과
‘과학의 대중화’로 계몽을 꾀했던 베르나르 퐁트넬,
‘최초의 무신론자’ 장 멜리에를 만나 보았습니다.


이번 방송에서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의 3대 천재 중
이름이 가장 긴 사상가 몽테스키외를 만나 봅니다.


몽테스키외의 진짜 이름은
‘샤를 루이 세콩다 드 라 브레드 에 드 몽테스키외’입니다.
진짜 길죠.
두 가문이 만난 탓입니다.
아버지는 왕실 친위대로 대검 귀족에 속했고,
어머니는 영국 위그노로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죠.

‘보르도’하면 떠오르는 ‘와인’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가정에서
몽테스키외는 부유하게 성장합니다.

“칼이 아니라 펜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했을까요?

몽테스키외는 대검 귀족 출신인 아버지가 아니라
법복 귀족 출신인 큰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합니다.

그.리.고.
보르도의 유명한 가문들이 후원하는
콜레주 드 줄리에 학교에 입학해
역사와 지리 및 고전 문학을 공부한 뒤,
19세에 보르도 대학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죠.

그럼, 인생 끝?
아니죠.

영국 어머니를 두었으나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파리의 살롱으로 진출하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 없었죠.
퐁트넬, 키케로를 공부하고,
후에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전초가 된,
《이교도의 사제》도 집필해
천천히 살롱의 문은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법원장이 된 몽테스키외는
파리 중심가에 저택도 마련하고,
드디어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네덜란드에서 익명으로 출판합니다.
불티나게 팔렸죠.
명성은 커졌고 바라던 파리 살롱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되었죠.

이후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로마 주민의 절제와 고대 로마인의 부절제 비교론》,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유럽에서의 세계 왕국 성찰》을 발표하고,
몽테스키외의 주요 저서인 《법의 정신》의 집필도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시기였고,
질병을 얻은 몸으로 노년을 맞게 된 몽테스키외는,
보르도 고등법원 수석 판사직까지 영구적으로 판매한 후,
《법의 정신》의 집필에 몰두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자유주의가 승리하려고 하는 물꼬를 트는 그런 시기”에 출판된
《법의 정신》은,
예수회와 얀센주의자의 반발과
파리 교황청의 금서 지정,
파리 대학 신학부에서의 이단 규정까지 받게 되죠.
세계 곳곳에서 ‘계몽주의의 선구자’라는 칭송의 편지와 함께요.

그리고 몽테스키외가 64세가 되는 해에,
달랑베르가 찾아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방송으로 접선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계몽주의의 선구자’라는 고유명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몽테스키외를 만나며,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한주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안녕~



1. 프랑스 위키- 몽테스키외
2. 《보편공의회사》, 클라우스 샤츠
3.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몽테스키외

“때는 바야흐로 자유주의의 물꼬가 트이는 시기였다.”
-방송 중에서

앞서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
‘똘레랑스의 창시자’ 피에르 베일과
‘과학의 대중화’로 계몽을 꾀했던 베르나르 퐁트넬,
‘최초의 무신론자’ 장 멜리에를 만나 보았습니다.


이번 방송에서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의 3대 천재 중
이름이 가장 긴 사상가 몽테스키외를 만나 봅니다.


몽테스키외의 진짜 이름은
‘샤를 루이 세콩다 드 라 브레드 에 드 몽테스키외’입니다.
진짜 길죠.
두 가문이 만난 탓입니다.
아버지는 왕실 친위대로 대검 귀족에 속했고,
어머니는 영국 위그노로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죠.

‘보르도’하면 떠오르는 ‘와인’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가정에서
몽테스키외는 부유하게 성장합니다.

“칼이 아니라 펜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했을까요?

몽테스키외는 대검 귀족 출신인 아버지가 아니라
법복 귀족 출신인 큰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합니다.

그.리.고.
보르도의 유명한 가문들이 후원하는
콜레주 드 줄리에 학교에 입학해
역사와 지리 및 고전 문학을 공부한 뒤,
19세에 보르도 대학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죠.

그럼, 인생 끝?
아니죠.

영국 어머니를 두었으나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파리의 살롱으로 진출하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 없었죠.
퐁트넬, 키케로를 공부하고,
후에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전초가 된,
《이교도의 사제》도 집필해
천천히 살롱의 문은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법원장이 된 몽테스키외는
파리 중심가에 저택도 마련하고,
드디어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네덜란드에서 익명으로 출판합니다.
불티나게 팔렸죠.
명성은 커졌고 바라던 파리 살롱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되었죠.

이후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로마 주민의 절제와 고대 로마인의 부절제 비교론》,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유럽에서의 세계 왕국 성찰》을 발표하고,
몽테스키외의 주요 저서인 《법의 정신》의 집필도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시기였고,
질병을 얻은 몸으로 노년을 맞게 된 몽테스키외는,
보르도 고등법원 수석 판사직까지 영구적으로 판매한 후,
《법의 정신》의 집필에 몰두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자유주의가 승리하려고 하는 물꼬를 트는 그런 시기”에 출판된
《법의 정신》은,
예수회와 얀센주의자의 반발과
파리 교황청의 금서 지정,
파리 대학 신학부에서의 이단 규정까지 받게 되죠.
세계 곳곳에서 ‘계몽주의의 선구자’라는 칭송의 편지와 함께요.

그리고 몽테스키외가 64세가 되는 해에,
달랑베르가 찾아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방송으로 접선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계몽주의의 선구자’라는 고유명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몽테스키외를 만나며,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한주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안녕~



1. 프랑스 위키- 몽테스키외
2. 《보편공의회사》, 클라우스 샤츠
3.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몽테스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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