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문학ㆍ언어

[어머니날] 부드러운 글, 강인한 마음… 에세이의 거장 린원웨(林文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의사가 어머니에게 침대에서 일어나 활동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부쩍 연약해지셨다. 우리를 지켜주던 어머니의 대담한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직접 어머니의 몸을 닦아드렸다. 처음엔 우리 둘 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머니는 “딸이 목욕을 시켜주다니, 민망해서 못하겠다…”라고 중얼거리셨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점점 긴장을 풀고, 조용히 내 손길에 몸을 맡기셨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도 이렇게 다정하게, 조심스럽게 나를 씻겨주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노쇠한 어머니는 내 품에 안긴 아기처럼 느껴졌다. 마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한 모성애가 가득 차올랐다.

타이완 대표 에세이 작가 린원웨(林文月)의 에세이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 드리기(給母親梳頭髮)〉중 한 대목입니다. 평생 머리를 자르지 않았던 어머니가 땅에 닿을 만큼 길고 검은 머리를 빗는 모습은 린원웨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얇고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어머니의 머리칼을 부러워했고, 때로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청춘을 딸에게 바치고 서서히 늙어갔습니다. 새까맣던 머리는 흰색으로 변했고, 풍성했던 숱도 절반도 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점점 작아진 과정에서 린원웨의 모성이 깨어났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딸이 되고, 딸은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어제가 바로 어머니날이었죠. 따슷한 봄 햇살 속, 카네이션의 그윽한 향기가 가득한 5월 둘째 주 일요일. 역사학자 롄헝(連橫)의 외손녀로 잘 알려진 린원웨는 중문학자, 번역가, 평론가 등 다양한 신분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부드럽고 두터운 에세이는 오늘까지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글은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어머니날마다 다시 꺼내 읽히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린원웨는 2023년 5월,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2주기를 앞두고, 오늘은 ‘타이완 문단의 영원한 재원’ 린원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마이웨이' 걷는 여자 💃

타이완 최고 명문 타이완대 중국어문학과에서 ‘린 선생’이라 하면, 누구나 린원웨를 떠올립니다. 그의 작품은 중화 문화의 깊은 뿌리, 그리고 에세이라는 장르가 가진 가장 순수한 본질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2살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는데요. 1933년 상하이의 일본 조계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 쇼와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타이베이로 이주했고, 일본인도, 중국인도, 타이완인도 아닌 어딘가에 떠 있는 존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한 마디도 못했던 그는 표기법부터 배웠고, 머릿속에서 중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해가며 공부했습니다.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타이완대에 합격했습니다.

1952년의 타이완, 대학은 오직 최우수 학생들만 갈 수 있는 지식의 궁전이었습니다. 이 중 외국어문학과는 여학생들의 1순위 전공이었는데, 실제로 린원웨의 반 친구 50명 중 48명이 외국어문학과를 지원했을 정도입니다. 린원웨는 바로 그 2명의 하나였죠. 어릴 적부터 문학의 꿈을 품었던 그는 지원서의 ‘외국’ 두 글자를 지우고 ‘중국’으로 고쳐 썼습니다. 결국 타이완대에서 고전문학을 깊이 연구하여 탄탄한 학문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1958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타이완대에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타이완대에서 수업하던 린원웨 - 사진: 타이완대도서관

결혼과 출산을 마친 후, 1969년 정부의 장학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요. 이 선택은 린원웨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토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연구하면서 교토에서의 생활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였지만, 점점 글쓰기에 매료되어 1971년 첫 에세이집 《교토 1년(京都一年)》을 출판했습니다.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이 작품은 타이완 3대 신문의 하나인 《중국시보(中國時報)》 주최의 시보문학상, 그리고 국가문예상과 타이베이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린원웨도 에세이 작가로서 정식 등단했습니다. 생활의 단상부터 여행의 기억, 음식의 이야기까지, 그는 이후 50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에세이를 쓰며 삶의 철학을 글에 담아냈습니다. 글쓰기의 목적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과 세상을 관찰하고, 그 감정을 진지하게 써내려가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겐지 모노가타리》 역자 ✍🏽

린원웨의 일본어 실력은 단지 유학 생활이나 에세이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일본 책을 번역해온 그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1972년 자신이 일본어로 작성한 논문을 중국어로 번역해 학술지 《중외문학(中外文學)》에 발표했는데, 그 안에 실린 《겐지 모노가타리》 일부 번역이 독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았습니다. 이후 《중외문학》출판사 책임자였던 후야오헝(胡耀恆) 타이완대 외국어문학과 교수는 린원웨에게 《겐지 모노가타리》의 번역 연재를 제안했습니다. 사실 린원웨가 정식으로 일본어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5학년까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 작업은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웠죠. 하지만 그는 끝내 해냈습니다. 5년 동안 마라톤 같은 시간을 거쳐, 이 천년 고전은 마침내 온전한 번역본으로 타이완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유명 작가 바이셴융(白先勇)은 린원웨의 글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맑고 온화하며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담백하게 풀어내고, 문장 안에는 지혜의 빛이 숨어 있다” 이어 린원웨의 또 다른 대표작을 소개하기에 앞서,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담은 곡, 함께 들어보시죠. 타이완을 대표하는 가수 저우제룬(周杰倫)이 어머니의 이름 ‘예후이메이(葉惠美)’를 따서 만든 앨범에 수록된 곡, ‘맑은 날(晴天)’을 띄워드립니다.

어머니에 대하여... 〈흰머리와 탯줄〉👩‍👧

린원웨의 작품 중 어머니를 주제로 한 또 하나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바로 1986년 발표된 〈흰머리와 탯줄(白髮與臍帶)〉인데요. 작가가 별세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과 다섯 자녀의 탯줄을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와 아이를 이어주는 이 두 물건을 통해, 생명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깊은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앞서 언급된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 드리기〉가 노쇠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모성애를 느낀 작품이라면, 〈흰머리와 탯줄〉은 탄생과 이별을 모성애라는 따뜻한 감정으로 풀어낸 글입니다.

이 작품은 린원웨가 화장대 서랍 정리를 두려워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장녀인 그는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된 다섯 남매의 탯줄과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을 작은 상자에 곱게 담아, 동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비록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어머니와 아이 간의 감정은 상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거죠. 그러나 상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던 린원웨는 오랫동안 그것을 서랍 깊숙이 넣어둔 채 꺼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어머니를 닮아갔습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똑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 즉 어머니의 생명을 더 빛나게 하려면, 딸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먼지를 닦고, 다시 서랍에 넣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축복을 받고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55년 22살의 린원웨 - 사진: 타이완대도서관

"나는 먼저 사람이다" ✨️

“나는 먼저 사람이고, 그 다음이 여자이며, 그 다음이 작가와 번역자이다” 린원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는데요. 직업보다 먼저는 가족, 가족보다 먼저는 사람. 자신의 삶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