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

민족문제연구소
역발상(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ポッドキャスト

민족문제연구소 공식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발상(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으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시작합니다. 국내 유일의 근현대사 전문 팟캐스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근현대사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 가야 할 인권,평화,민주주의의 미래를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1. 2日前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7부 "만주 악도(樂都) 하얼빈, 북방의 노래"

    출연:이준희,신현준 오늘 이야기:"만주 악도(樂都) 하얼빈, 북방의 노래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히라이 미나코(平井美奈子). 1933년 음반): 청나라 황실 출신인 만주족 아이신기오로셴위(愛新覺羅顯玗)가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녹음한 몽골어 노래. 진비후이(金璧輝)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던 가와시마 요시코는 ‘동양의 마타하리’, ‘만주의 잔 다르크’라 불리며 남장(男裝)으로도 유명. 잠시 살았던 남편이 몽골인. 1절은 가와시마 요시코가 저음으로, 2절은 성악을 전공한 히라이 미나코가 고음으로, 3절은 두 사람이 허밍으로 부름. 2절 가사는 가와시마 요시코가 일본어로 번역 (쇼지 타로(東海林太郞). 1934년 음반): 후지야마 이치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1930년대 인기 가수 쇼지 타로의 대표작. 썰매가 달리는 눈 덮인 만주 벌판을 소재로 한 ‘대륙 멜로디’ 히트곡. 쇼지 타로는 가수 데뷔 전 1923년부터 1930년까지 만주에 거주하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즉 ‘만철(滿鐵)’의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만철은 관동군과 함께 사실상 만주국을 운영했던 일본판 동인도회사. 1935년에는 조선에서 번안곡 이 나오기도 했는데, ‘동양의 카루소’라 불리며 일본 최고의 테너로 활약하다가 1960년에 ‘북송선’을 탄 김영길(나가타 겐지로)이 취입 (핫토리 토미코(服部富子). 1938년 음반): 핫토리 료이치의 동생인 핫토리 토미코의 노래. 작곡자는 오빠가 아니라 스즈키 테츠오(鈴木哲夫). 1939년에는 같은 곡에 중국어 가사를 붙인 번안곡 이 리샹란(李香蘭)의 노래로 만주국 바이러(百樂)레코드에서 발매. 바이러는 일본 데이치쿠레코드의 만주 자회사(?). 바이러레코드에서는 핫토리 토미코의 일본어 곡과 리샹란의 중국어 곡을 앞뒤로 묶은 음반도 발매. 일본인이 만주 소녀에 대해 투사한 이미지를 볼 수 있으며, 조선에서 만주의 중국인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와도 관련 있는 곡 (채규엽. 1939년 음반): 193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이런저런 곡절로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채규엽의 재기작. 실제 ‘오천키로’는 아니지만 그만큼 먼 곳으로 표현된 ‘북국’은 만주의 하얼빈. 가사에 등장하는 페치카, 모스도와야, 키타야스카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 당시 조선 문인들이 기행문이나 소설 등에도 자주 등장한 하얼빈의 정취가 유행가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 텍스트. 박영호와 이재호의 작사-작곡 콤비는 태평레코드라는 시스템의 산물 (오쿠야마 사이코(奥山彩子)·리샹란·바이광(白光). 1940년 음반): 유행가’ 곡종 아래 ‘일만지(日滿支) 친선가’ 표기가 눈길을 끄는 곡.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의 ‘국책’을 적극 반영한 노래. 때문에 가수도 일본인, 만주인(만주 출생 일본인), 중국인으로 구성. 세 사람이 각자 한 절씩 부른 뒤 마지막 제4절은 합창. 모두 유창한 일본어로 노래. 작곡은 고가 마사오 (이해연·리샹란, 1943년 음반): 만주영화협회, 즉 만영과 쇼치쿠가 함께 만든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영화 (1942년 3월 개봉)의 주제가. 영화는 만주국에서 펼쳐지는 일본인 남성과 만주인·일본인 여성 사이 삼각관계를 다룬 ‘국책 로맨스’. 원래 사이조 야소가 일본어로 작사하고 고가 마사오가 곡을 썼는데, 제2절 가사를 ‘白文會(개인? 단체?)’가 만어(중국어)로 번역한 뒤, 리샹란의 노래로 1942년에 발매. 몇 달 뒤 제1절 가사를 조선어로 번역해(조명

    1時間49分
  2. 9月10日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6부 "동아시아 재즈송: 핫토리 료이치와 김해송"

    출연:이준희,신현준 오늘 이야기:동아시아 재즈송 ' 핫토리 료이치와 김해송' (복혜숙. 1930년 음반) 원곡은 1929년 일본에서 발표된 후타무라 테이이치 노래 (삿사 코카(佐々紅華) 작곡). 이후 유행가 혹은 가요곡으로 불리며 여러 차례 다시 녹음되기도 한 일본 유행가의 고전이지만, 당시에는 재즈송으로 불림. 조선 최초로 레코드에 ‘재즈송’이 표기되었다는 기록의 가치가 있음. 일본 초판에는 곡종 자리에 ‘폭스트로트’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920년대 일본 재즈를 2박자 폭스트로트 리듬, 즉 사교댄스 리듬이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줌 (춘춘, 1933년 음반): 곡종은 ‘유행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문명화된 여자’인 화자가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면서 “남녀 쌍쌍이 추는 트로트(道樂道)”에 빠져 있다는 가사가 나옴 작사자 천진위(陳君玉)는 중국 대륙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대만에서 신문학운동에 참여. 작곡자는 대만 유행가 고전을 많이 작곡한 덩위셴(鄧雨賢). 2003년에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춘춘의 후배인 가수 아이아이(愛愛)의 구술과 대만 가수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취입 여행을 가는 재연 장면이 나옴 〈ダイナ〉(디크 미네(ディック・ミネ). 1934년 음반) 1925년 미국에서 발표된 (해리 아크스트(Harry Akst) 작곡)의 번안곡. 1934년 나카노 타다하루(中野忠晴)의 음반이 처음 나왔고, 이어 같은 해 연말에 디크 미네의 ‘재즈송’ 음반이 발표되어 크게 히트. 디크 미네는 노래는 물론 작사·편곡·연주(하와이안기타)까지 담당. 인상적인 트럼펫은 ‘Japanese Satchmo’ 난리 후미오(南里文雄)의 연주. (박향림, 1938년 음반) 1937년에 핫토리 료이치 작곡, 아와야 노리코 노래로 대히트를 기록한 의 조선어 번안작. 핫토리 료이치의 ‘와세이(和製) 블루스’에 대해 미국 블루스의 변질 논란이 있지만, ‘블루스’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장르로 이어져 온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음. 암울한 분위기는 전시체제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가사기 시즈코(笠置シヅ子). 1939년 음반) 쇼치쿠(松竹)소녀가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사기 시즈코의 첫 음반(다른 이름으로 발표한 데뷔곡은 1934년). 운명의 콤비 핫토리 료이치 작곡. 가사기 시즈코는 전후 ‘부기의 여왕’으로 유명해졌지만, 전전에도 요란한 무대 매너로 오사카에서(도쿄가 아닌 것이 중요) 이미 유명. 무대에서 너무 요란하다는 이유로 검열 대상이 되기도. ‘기원 2600년’인 1940년 이후 한동안 잠수를 타게 되는 일본 재즈의 파격 (오케재즈밴드, 1940년 음반) 노래가 아닌 연주곡으로, 김해송의 작품. 1940년은 조선 재즈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 김해송은 직접 부르기도 한 (1938년)이나 부인 이난영이 노래한 (1939년) 등으로 조선 재즈의 대표자임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재즈 악단의 밴드마스터로서 그의 진면목은 오히려 이런 곡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남. 민요 이 중간에 재즈로 변주되는 편곡은 말 그대로 ‘압권’ (빅 맥스웰(Vic Maxwell). 1941년 음반) 원래 1939년 10월 개봉 영화 삽입가로 만들어졌던 탱고 곡 . 영화 개봉과 함께 아와야 노리코의 음반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검열 문제로 발매가 금지되고 영화에서도 삭제. 작곡자 핫토리 료이치(혹은 콜럼비아레코드)는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 제목과 가사를 영어로 바꾸고, 작곡자 이름도 R. Hatter로 표기해 양악반으로 위장한 뒤 1941년에 발표. 빅 맥스웰은

    1時間18分
  3. 9月3日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5부 "유행가 아리랑: 조선 민요에서 동아시아 유행가로"

    출연:이준희,신현준 오늘 이야기: "유행가 아리랑: 조선 민요에서 동아시아 유행가로" (김연실. 1930년 음반) 19세기 말부터 경기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던 민요 곡조를 서양음악 식으로 편곡한 동명 영화(1926년 10월 개봉) 주제가. 작곡자(편곡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화 개봉 극장 단성사와 관련 있는 인물로 추정. 나운규가 가사를 썼다고는 하나, 여타 민요에서 종종 보이는 통속적 어구의 조합으로 볼 수도. 김연실 음반은 노래만으로 녹음된 첫 번째 . 원래 표기는 ‘영화소패 아르렁’ (골든 마스크(金色假面). 1931년 음반): 일본에서 발매된 첫 번째 음반. 골든 마스크는 고바야시 치요코(小林千代子)가 데뷔 당시 사용한 예명(실제로 가면을 쓴 사진으로 등장하기도). 영화 주제가 은 일본에서만 음반 수십 종이 나올 만큼 큰 인기를 끈 ‘조선풍’ 유행가가 됐으나, 조선의 여타 아리랑은 일본에서 수용된 흔적이 거의 없음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아와야 노리코(淡谷のり子). 1932년 음반) 조선과 연이 깊은 고가 마사오 편곡 버전. 조선인 가수 채규엽이 일본식 이름으로 녹음. 함께 녹음에 참여한 음악학교 출신 가수 아와야 노리코는 193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스타였으나, 그의 가창은 전형적인 ‘엔카’와 거리가 있는 스타일. 1930년대 후반에는 ‘블루스의 여왕’으로 각광을 받기도. 익숙한 곡조이기는 하나, 고가 멜로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편곡 (김용환‧왕수복‧윤건영. 1934년 음반) 1929년 조선가요협회 활동의 결과로 발표된 곡. 작사자 김석송과 작곡자 안기영 모두 조선가요협회 회원. 라디오 방송과 을 통해 먼저 소개되었고, 1931년에 성악 합창곡으로 첫 번째 음반 발매. 유행가 가수들이 녹음한 1934년 음반은 세 번째 음반. 현재 개념으로 아리랑을 품은 ‘가곡’이라 할 수 있는 이 노래를 유행가 가수들이 ‘감히’ 녹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작곡가 안기영의 잠수(?) 때문. 이 화여전 유부남 교수 안기영과 실력 있고 당돌한 제자 성악가 김현순이 펼친 웅대한 스케일의 스캔들. 1950년에 안기영‧김현순이 월북한 이후로 남한에서는 한동안 금지곡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고전 ‘가요’로 계속 존중을 받았던 노래 (다카미네 미에코(高峰三枝子). 1940년 음반) 1931년 이후 한동안 개사와 편곡 단계를 거친 일본 아리랑은 1930년대 중반부터 창작으로 확장. 는 배우 겸 가수로 인기 있었던 다카미네 미에코의 대표작 중 하나. 아와야 노리코의 노래로 일본식 블루스(나아가 동아시아 블루스)의 전형을 확립한 핫토리 료이치(服部良一)의 작품 (슈롼. 1939년 음반) 1930년대 대만에서도 이 유행가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 음반 곡종 표기 역시 ‘유행가’. 경성 녹음이 일부 가능했던 조선과 달리 대만 음반 녹음은 모두 일본 본사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도 조선과 대만의 직결이 아닌 일본의 매개를 통한 간접 교류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 (야마나카 미유키(山中みゆき). 1937년 음반): 조선 민요 아리랑이 만주를 배경으로 한 일본 유행가의 소재가 된 경우. 작곡자는 일본 ‘대륙 멜로디’의 대표작 를 만든 아베 타케오(阿部武雄). 확인된 예는 아직 없지만, 만주 또는 중국에서 제작된 유행가 음반에 아리랑의 흔적이 보일 가능성도 충분 (장옥화. 1942년 음반) 동아시아 유행가로 자리 잡은 아리랑이 ‘대동아’ 이념을 구현

    1時間37分
  4. 7月23日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4부 "조선과 대만의 유행가: 이애리수와 춘춘(純純)"

    출연:이준희,신현준 오늘 이야기: 조선과 대만의 유행가: 이애리수(1911~2009)와 춘춘(純純. 1914~1943) (이애리수. 1932년 음반) 배우 겸 가수로 인기를 누렸던, 그리고 정사 시도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이애리수의 대표작. 앞선 10년 동안 적지 않은 유행가 음반이 나왔지만, 조선 유행가가 정착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작품으로 평가. 4·7음이 빠진 단조 5음계와 3박자 리듬은 초창기 조선 유행가의 나름 독특한 형식으로 볼 수도 (이애리수. 1932년 음반) 이애리수가 을 녹음하러 일본에 갔을 때 그 곡조에 흥미를 느낀 사이조 야소가 새로 가사를 붙인 의 일본어 버전. 과 달리 2박자 트로트. 은 일본 번안곡이 존재하지 않지만, 는 일본 시장에서도 먹혔던 이유가 그런 차이 때문일 수도 (이난영. 1934년 음반) 노래 대신 사랑을 택한 이애리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디바가 된 이난영의 초기 히트곡. 엄연히 ‘유행가’이지만, 오늘날은 신민요 정취가 있는 곡으로 평하기도. 윤석중의 가사는 노래보다 앞서 1933년 지면에 ‘민요’로 발표. 이난영이 1936년부터 일본에서 오카 란코(岡蘭子)로 음반을 내면서 가장 먼저 발표한 것이 의 번안곡인 . 미국에서 활동한 이난영의 딸들과 조카인 김시스터즈도 1964년에 음반 발매(한국어 가창) (장세정. 1937년 음반) 이난영과 쌍벽을 이루었던 가수 장세정의 데뷔곡이자 대표작. 이난영의 남편인 김해송의 대표적인 대중적 히트곡이자, ‘조선 취입소 설치 기념 임시발매’ 곡이기도. 여성 가수의 음악학교 성악 학습 배경이 일반적이었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그런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례가 장세정(개인 교습). 1951년 일본에서 스가와라 스즈코(菅原都々子)의 번안곡도 발표되어 크게 유행 (춘춘. 1932년 음반) 1931년에 상하이에서 제작, 개봉된 동명 무성영화의 홍보곡(?). 음반에는 ‘주제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영화 제작이 아닌 개봉 상황에 맞춰 대만에서 새로 만든 노래. 예전에는 대만 최초의 유행가 음반으로 알려지기도(지금은 1929년 으로 공인된 상황). 영화의 주연은 롼링위와 진옌 (춘춘. 1933년 음반) 춘춘은 유행가 가수로 등단하기 전 대만의 근대 재래음악극 거짜이시(歌仔戲) 배우로도 활약. 와 등의 연이은 히트로 대만 유행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로 군림. 은 지금까지도 대만에서 유행가 제1의 고전으로 존중받는 작품. 춘춘의 노래는 1937년 12월에 중계를 통해 경성방송국에서도 소개 (슈롼(秀鑾). 1936년 음반) 1930년대 중반에 데뷔해 춘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 가수 슈롼의 대표작. 재래음악의 정취가 느껴지는 춘춘의 가창과 달리, 슈롼은 보다 유행가스러운(?) 목소리. 1939년에는 앞서 본 와 다음 시간에 볼 ‘대만 아리랑’ 을 대만어(복건어·민남어) 가사로 발표하기도. 20세기 전반 동아시아 대중음악의 양대 중심이 중국과 일본, 그 중에서도 상하이와 도쿄라면, 중국과 일본 국내(?)에는 홍콩이나 오사카 같은 부심(副心)도 존재했고, 외지(外地)라 불린(일본 입장에서) 대만·만주·조선 등은 중심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하위 권역으로 존재. 대만과 만주는 중국·일본과 연관이 병존했고, 조선은 일본에 보다 강하게 연계

    1時間42分
  5. 7月16日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3부 "일본과 중국 대중음악의 성장기 : 고가 마사오 그리고 런광과 네얼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와 런광(任光. 1900~1941)/녜얼(聶耳. 1912~1935)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 1931년 음반): 앞서 발표한 와 함께 작곡가 고가 마사오의 입지를 다진 히트작. 노래를 소재로 영화까지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에 개봉됐고, 조선과 대만에서도 번안곡으로 유행. 형식적인 면에서 엔카의 전범과도 같은 작품. 후지야마 이치로는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 (미치 얏코(美ち奴). 1936년 음반): 조선에서 성장하고 음악학교 경력이 없다는 점에서 일본 대중음악 작곡계에 매우 예외적인 존재였던 고가 마사오. 그의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스타일, 이른바 ‘고가 멜로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미치 얏코는 게이샤 출신 가수. 가사 중 의미 없이 어감을 위해 사용된 ‘네’가 ‘에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검열의 집중 대상이 된 에로 유행가들 중 몇몇은 금지곡이 되기도 (후지야마 이치로. 1936년 음반) 역시 고가 마사오의 다양한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예. 고가-후지야마 콤비의 인기 절정과 전전 ‘모던 도쿄’의 번영을 보여 주는 작품. 이 곡 역시 영화로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에 개봉했고,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는 주연으로 출연 (기리시마 노보루(霧島昇)·후타바 아키코(二葉あき子). 1940년 음반) 조선에서 성장한 배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3박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일본 대중가요에서 3박자 히트곡이 많은 편인 고가 마사오. 원래 이난영이 일본에서 발표한 곡이었던 를 다듬어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 (1940년 5월 개봉)의 주제가로 다시 발표 (왕런메이. 1934년 음반) 1934년 6월에 개봉한 동명 무성영화(?) 주제가로, 런광의 대표작. 왕런메이는 영화 주연이면서 주제가도 녹음. 영화 은 1930년대 중국 영화에서 대표적인 좌파 작품으로 꼽히며, 1935년 제1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영예상’ 수상. (위앤무즈(袁牧之)·구멍허(顧夢鶴). 1935년 음반): 1935년 5월에 개봉한 또 다른 좌파 영화 의 주제가이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이기도. 요절한 좌익 작곡가 녜얼의 작품. 위앤무즈와 구멍허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 주제가 녹음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왕런메이와 저우쉬앤도 영화에 배우로 출연. 작사자 톈한(田漢)이 문화혁명 당시 옥사하면서 이후 몇 년 동안은 국가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저우쉬앤(周旋). 1937년 음반) 1937년에 개봉한 영화 의 삽입가.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며 1940년대 상하이 ‘7대 가후(歌后)’의 으뜸으로 인기를 누렸던 ‘金嗓子’ 저우쉬앤의 대표작.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을 오랫동안 풍미한 중국 고전 대중가요의 명곡. ‘군(君)’이 ‘군(軍)’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 등으로 중국과 일본 양측으로부터 금지를 당하기도 (진옌·롼링위(阮玲玉). 1930년 음반) 1930년 12월 개봉 무성영화(?) 삽입가. 1935년에 스물다섯으로 요절한 당대의 스타 롼링위가 녹음한 유일한 노래로 한동안 알려지기도. 진옌은 이 외에도 여러 영화 주제가를 녹음. 음반은 영화 개봉 전 홍콩 소재 신위에(新月)레코드에서 발매

    1時間50分
  6. 7月9日

    시즌3_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2부 "일본과 중국 대중음악의 탄생기: 나카야마 신페이와 리진후이

    이번 이야기:일본과 중국 대중음악 개척기 출연:신현준,이준희 (마쓰이 스마코(松井須磨子). 1914년 음반): 일본 대중가요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 톨스토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의 주제가. 마쓰이 스마코는 연극에서 카츄샤 역을 맡았던 배우이기도. 가사를 쓴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는 극작가·연출가이며 마쓰이 스마코의 연인. 시마무라가 1918년 11월에 독감으로 사망하자, 마쓰이 스마코도 1919년 1월에 그를 따라 자살. 는 1916년 이후 조선어 버전도 유행 (돗토리 순요. 1923년 음반): 1921년에 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발표되었고, 2년 뒤 음반과 영화(1923년 1월 개봉)으로도 등장. 초창기 엔카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라는 제목으로 1920년대에 크게 유행. 윤심덕도 녹음을 했고, 김소월 시 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부정적으로) (사토 치요코(佐藤千夜子). 1929년 음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무성영화 (1929년 5월 개봉)의 주제가. 시인 겸 작사가로 유명한 사이조 야소(西條八十)의 가사. 조선에서도 번안곡 발매 (고우타 가쓰타로(小唄勝太郎)·미시마 잇세이(三島一声). 1933년 음반): 한 해 전에 발표된 곡조에 새로운 제목과 가사를 붙인 작품. 역시 사이조 야소의 가사. 여름철 ‘본오도리’ 춤과 결합해 일대 온도 붐을 일으켰던 곡이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활용 중. (리밍후이. 1932년 음반): 중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 첫 음반은 1927년에 발표. 1932년 음반은 초판에 비해 속도가 빨라지고 재즈 느낌이 짙어진 새로운 편곡의 녹음. 리진후이는 대부분 곡을 직접 작사. 본격적인 음악 활동 전에 ‘국어’ 교과서 편집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의 이력과도 관련 (리리리(黎莉莉)·왕런메이(王人美). 1931년 음반): 리진후이는 1920년대부터 가무단을 조직해 중국 각지는 물론 동남아시아 일대(화교 대상)를 순회하는 공연 활동 전개. 딸 리밍후이를 비롯해 많은 가무단 단원들이 중국 대중문화의 스타로 성장. 리리리(1915년 생)와 왕런메이(1914년 생) 역시 리진후이 가무단 출신. 리리리는 리진후이의 수양딸이 되었으므로, 예명 성을 ‘리’로 사용. 왕런메이 역시 리진후이가 지어준 예명. (리리리·왕런메이. 1931년 음반): 남녀간 사랑의 ‘스피드’를 특급열차에 비유한 노래. 왕런메이의 첫 번째 남편은 1930년대 상하이의 ‘影帝’로 불렸던 조선인 스타 진옌(金焰)

    1時間20分
  7. 7月2日

    시즌3_동아시아의 유행가 시대 1914~1945_1부 "동아시아 대중음악의 출발: 잡가, 창가, 엔카시, 가극, 재즈 등"

    오늘의 이야기: 동아시아 대중음악의 출발 초대손님: 신현준(성공회대 교수) 이준희(옛가요 전문가) (이일선. 1928년(?) 음반) 통속적인 재래 잡가에 시대상을 반영한 가사 추가(안창남과 엄복동). 이와 달리 서양악기를 반주에 추가해 음악적 변화를 주는 경우도 존재. 통속 재래음악의 가사나 곡조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는 방식은 동아시아 초기 대중음악에서 공통적인 현상 (청년회원. 1913년 음반) 재래음악과는 다른 서양음악 형식 노래인 ‘창가’의 대중적 유포. 일본 곡조에 가사는 조선어(작자 미상). 는 1900년에 오노 우메와카(多梅稚)가 작곡. 참고로 최남선이 지은 창가 (1908년) 곡조는 스코틀랜드 노래 (박채선·이유색. 1923년 음반): 제레미아 잉갈스(Jeremiah Ingalls)가 편곡(?)한 미국 찬송가 이 일본 창가 로, 가 다시 유행가 로 변화한 뒤, 1919년 무렵부터 조선에서 로 유행. 서양음악 곡조이지만 창법은 잡가 스타일. 음반에 녹음된 첫 번째 한국 대중가요로 거론 (박재국. 1926년 음반): 조선 엔카시 노래의 대표적인 예.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당대 엔카시의 대표 레퍼토리 네 곡을 메들리로 노래. 박재국 외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우영식과 장석환도 엔카시 음반을 녹음. 조선 엔카시가 일본만큼 성황이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엔카시의 가두 연주와 함께 엔카시의 주요 판매 상품이었던 노래책은 음반 못지않은 중요한 유행가 유통의 장 (돗토리 슌요(鳥取春陽)·도키와 시즈코(常盤靜子). 1926년(?) 음반) 조선 엔카시에 많은 영향을 준 일본 엔카시의 대표적 인물 돗토리 슌요의 히트작. 1923년 발표 이후 일본과 조선에서 다양한 음반이 만들어졌는데, 이 녹음은 특이하게 일본어와 조선어로 번갈아 노래하는 ‘일선융합’ 버전. 유행가의 경계 넘기는 현재 국가 단위가 아닌 동아시아 차원에서 당시 음악을 보아야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 (리밍후이(黎明暉). 1926년 음반) 리밍후이의 아버지이자 중국 대중음악의 선구자인 리진후이(黎錦暉)의 작품. 리진후이는 본격적인 대중가요 창작 이전에 다양한 음악 분야를 섭렵했고, 많은 가(무)극도 창작. 은 1922년에 발표한 아동 가(무)극. 판소리·경극·나니와부시 등 동아시아 재래 극음악은 1900년 전후로 음반 녹음이 시작될 때 가장 인기 있었던 레퍼토리. 그에 이어 서양음악 형식을 수용한 새로운 가(무)극도 음반과 무대를 통해 유통 (후타무라 테이이치(二村定一). 1928년 음반) 1920년대는 동아시아 재즈의 초창기. 음반이나 영화 등 매체를 통해, 또는 인적 왕래를 통해 수입·모방 과정을 거친 재즈는 1920년대 말에 창작으로 진전. 1927년 미국에서 발표된 (월터 도널드슨(Walter Donaldson) 작곡)의 번안곡인 는 일본 재즈 붐의 기폭제가 된 작품. 후타무라 테이이치는 ‘소녀가극’과 함께 일본 근대 가(무)극의 양대 줄기라 할 수 있는 ‘아사쿠사(淺草) 오페라’ 출신이기도

    1時間42分

評価とレビュ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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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組について

민족문제연구소 공식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발상(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으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시작합니다. 국내 유일의 근현대사 전문 팟캐스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근현대사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 가야 할 인권,평화,민주주의의 미래를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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