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겠죠] 남편은 강아지 같습니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하루 종일 주인만 기다린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달려와 가방을 들어줍니다. 진짜 반려견 미미는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엎드려 우리를 시큰둥하게 구경하고요. 지난달에는 남편이 나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할 때마다 따귀라도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어요. 물론 실제로 때리진 않았으니 오해 마세요. 억지로라도 웃으며 그의 장단에 맞췄습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회사였습니다. 재작년에 미미랑 똑같이 거실 소파에만 붙어있는 남편이 숨 막혀 도피성 취업을 했거든요. 집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얼마나 야근했는지 모릅니다. 집을 벗어나 갈 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월급까지 받으니 참으로 벅찼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타고난 체력이 좋거든요. 새벽마다 용수철처럼 일어나 식탁에 남편의 세 끼 식사를, 바닥에 미미의 사료를 떨궈놓고 출근했지요. 그렇습니다. 내 몸과 마음은 90% 이상 회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상황이었으니 여직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자랑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사무실에서 상주하는 사람이라고, 집에는 잠깐 밥이나 차려주러 가는, 출장 요리사나 마찬가지라고요. 며칠 후 사장님이 면담을 요청했어요. 심각한 얼굴로 “자네, 회사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네” 하더군요. 칭찬인 줄 알고 “과찬이십니다” 했지만 사장님의 두 뺨이 팽팽해지더니 불같이 화를 냈어요. 내게 당신 같은 인간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냐고 윽박 질렀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놀라면 말 한 마디 못하고 울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그대로 눈물을 쏟으며 조퇴했습니다. 집에는 가기 싫고,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기다렸어요. 회사의 누군가가 나에게 영문을 말해주기를. 그날따라 메일함이 잠잠했습니다. 저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는 동생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의심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회사의 두루마리 휴지, 치약, 포스트잇, 믹스커피를 훔치는 좀도둑이 있는데 범인을 못 찾아 몇 달째 운영비만 숭덩숭덩 빠져나갔다고 했어요.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내 회사에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데 동생 말로는 제가 그 좀도둑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누가 저를 조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밝혀졌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훔칠 의도는 없었더라도 회사에 평균 이상으로 머물면서 소변도 자주 보고, 양치도 서너 번씩 하고, 커피도 자주 마셔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좀도둑이 따로 있는데 내가 누명을 쓴 건지, 아니면 내가 물품을 많이 써버려서 허구의 좀도둑 캐릭터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회사를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과유불급을 가슴에 새기고 퇴사했지요. 지금도 회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나를 오해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품을 낭비하는 것 같다고 중간에 귀띔해주었더라면 집에서 휴지나 커피를 챙겨왔겠지만, 재직 중에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퇴사를 알면 기뻐서 벼룩처럼 날뛸 텐데요. 손을 붙잡고 “다시는 취직하지 말아요”했겠지요. 아기나 만들자고 할 겁니다. 이래서 부잣집 백수에게 시집오는 게 아니었는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욕망이라고는 식욕 수면욕 성욕밖에 없는 남자를 배경만 보고 선택한 내가 천치였습니다. 요즘은 저도 많이 진정되었어요. 다행히 다시 취업됐거든요. 예전 회사에서는 전공을 살려 재무회계 담당자로 일했는데, 지금은 샌드위치 공장과 카레집에서 일합니다. 아침 다섯 시부터 아홉시까지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만들면 운전사가 트럭 가득 샌드위치를 싣고 카페와 편의점에 납품하러 갑니다. 신선한 양상추와 계란, 햄을 품은 식빵들을 랩으로 꾹꾹 포장하다가 오늘도 누군가 이걸 먹고 열심히 일할 것을 상상하면,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간편식을 만드는 게 이렇게 보람찰 줄은 몰랐어요. 역시 사람은 무엇이든 경험해야 아는 법인가 봅니다. 샌드위치 공장에서 퇴근한 후에는 집에 들어가 남편의 아침, 점심, 저녁을 식탁 위 그릇 세 개에 덜어놓고 미미의 사료는 식탁 밑에 두고 다시 집을 나섭니다. 그래 봤자 오전이어서 남편과 미미는 내가 왔다간 줄도 모릅니다. 자느라 바쁘지요. 저는 살금살금 현관문을 닫고 삼성역으로 갑니다. 역사 자판기에서 마운틴듀를 뽑아 공장에서 손수 만든 샌드위치와 함께 먹어요. 매일 먹는데도 물리지 않고 맛이 좋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식사하는 것은 다소 추접한 것 같아 다 먹을 때까지는 지하철을 몇 대고 보내버립니다. 벤치에 앉아 지하철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며 꼭꼭 씹어먹는 것을 좋아해요. 천천히 먹다가 지하철을 아홉 대나 보낸 적도 있지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식사를 마치면 2호선 순환 열차를 탑니다. 휴대폰으로 오후 세시에 알람을 맞추고 낮잠을 잡니다. 그때가 보통 오전 11시 30분쯤인데 그 시간이면 사람이 없거든요, 맨 끝 칸에 타면 언제라도 앉을 수 있어요. 종아리 뒷부분에 따뜻한 히터 바람이 닿으면 숙면도 순식간입니다. 알람에 깨면, 안성맞춤으로 제가 일할 곳 근처의 지하철역이라서 곧장 내려 택시를 타고 두 번째 일터로 가면 됩니다. 오후에는 신촌의 카레집에서 일해요. 원래 달콤한 카레는 선호하지 않는데, 이곳의 카레는 설탕 단 맛이 아니라 파인애플과 꿀의 단 맛이어서 나쁘지 않습니다. 주인이 남은 카레를 싸주면 야식으로 식빵을 찍어 먹거나, 소면을 말아먹어도 그만이고요. 한 회사에 열과 성을 바치다가 과유불급을으로 해고되지 않게, 직장을 두 곳으로 잡았습니다. 네, 제 의도였어요. 하지만 재무회계팀에서 일하다가 왜 요리와 서빙에 뛰어들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능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 본능이 만들어진 데에도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쩌면 예전 회사에서 일하면서 남편과 미미의 요리를 빠른 속도로 챙기는 것에 재미 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 일에 노련해지는 것과 비례해 출장 요리사로서의 능력이 향상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지금 든 생각인데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은, 집에 몸을 안 쓰는 존재들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남편과 미미에 대한 반발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각을 하다 보면, 참으로 끝이 없습니다. 인생도 끝이 있어 흥미로운 것처럼, 생각에도 끝이 있어야 흥미롭겠죠. 남편에 대한 생각도, 미미에 대한 생각도, 저들은 왜 저렇게 세로형으로 서있지 못하고 가로형으로 누워만 있을까에 대한 생각도, 끝을 낼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카레를 서빙하다 보면 말이에요. 퇴근길에는 다시금 그쳤던 생각이 소나기처럼 내리지만, 그건 그야말로 날씨와 같아 제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왜 부잣집 며느리가 되고도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가’에요. 하지만 이거야말로 이유가 명확해서, 다시 쉽게 생각을 끝낼 수 있지요. 가난이 지겨워 이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명확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행복했어요. 결혼하길 잘했다, 싶었고요.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반려견과 똑같이 행동하는 남편을 보면서 마음이 먼저 가출했어요. 강아지들 말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라 강아지의 보편적 생활습관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요. 강아지도 귀엽긴 하지만, 그것도 강아지 나름이겠지요. 어느덧 한밤중입니다. 남편과 미미가 잠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카레에 밥을 비벼 먹고 식기세척기를 돌립니다. 남편이 깰까 봐 숨죽여 설거지하는 대신 이렇게 비싼 무소음의 기계로 접시를 닦을 수 있다니, 이럴 때 부잣집 며느리라는 게 실감 납니다. 오늘 밤은 이런 생각도 드네요. 10년 후 제가 어디서 일하고 있을지에 대해서요. 아이가 있을까요? 미미는 살아있을까요?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내가 남편과 함께일지, 남편이 살아있을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감이 안 옵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해야겠습니다. 어서 아침이 오면 좋겠어요. -끝- 이야기의 저작권은 디노디노에게 있습니다. 블로그: www.dinodino.net 네이버 포스트: http://post.naver.com/my.nhn?memberNo=1472083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dinodino_story/ 팟캐스트에서 소설을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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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April 8, 2015 at 11:38 AM UTC
- Length12 min
- RatingCl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