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episodes

조선연예인 비사(祕史‪)‬ Unknown

    • Artes

    33. 나는 종놈이로소이다. 이단전

    33. 나는 종놈이로소이다. 이단전

    그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단전(李亶佃), 즉 진실로(亶), 밭을 가는 놈(佃)이라는 뜻인데 설마 부모가 지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리고 필재(疋漢)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의미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래 하(下)자와 사람 인(人)자를 파자해서 필(疋)자로 정했습니다.”
    뒤에 붙은 한은 보통 천한 남자를 지칭하는 상놈이라는 뜻의 상한(常漢)에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을 호는 하인 놈, 혹은 아랫것이라는 뜻이다. 괴상한 이름에 아랫사람을 지칭하는 호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패랭이라고 불리는 평량자를 늘 쓰고 다녀서 이단전 대신 이평량이라고도 불렸다. 연안 이씨 집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양반집 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도 되어있다. 전자가 맞 다고 해도 아마 몰락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돈을 모으면 양반신분을 사거나 양반 행세를 하던 시대에 일종의 역주행을 한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삐딱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시’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를 짓는 솜씨하나만큼은 글공부를 한 양반 뺨을 칠 정도였다.

    洞葉蕭蕭下 마을의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溪雲寂寂生 시냇가의 구름이 조용히 일어나네.

    짤막한 그의 시를 보면 과장되고 부풀어 올린 것이 아닌 서정적이면서 차분한 감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신 갑자기 방문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곤 했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도 그의 방문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선비 심노숭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는 이단전을 천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규장각의 사검서와 절친하게 지냈다고 설명한다. 사검서는 서얼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백탑파의 핵심인물이다. 이들과 친했다면 아마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까지 역임했던 남공철이 그를 통해 최북과 만났는데 이것을 보면 최북은 물론 남공철 같은 양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재기발랄한 그의 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하인이라는 뜻의 이름과 호를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항거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없이 궁금하다. 이단전은 항상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시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병에 걸려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노숭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운 최후에 대해서 짤막하게 남겨 놨다. 중인들이 주축이 된 여항문인들이 시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시를 짓고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통청운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도 양반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특정 계층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

    • 9 min
    ★스마트 미디어 N 2016년 신년인사★

    ★스마트 미디어 N 2016년 신년인사★

    새로운 미디어 언론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한 2015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스마트 미디어 N에 보내주신 관심과 배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6년에도 공감, 소통, 공유, 창조를 위해 쉼없이 발전하는 스마트 미디어 N이 되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더 많이 웃으시고, 더 큰 성공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 46 sec
    32. 이름 모를 차력사

    32. 이름 모를 차력사

    임창정 주연의 영화 색즉시공에서는 차력 공연이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철근 구부리기나 못을 휘는 걸 보면 누구나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이다. 추재기이에서 파석인(破石人)에 관한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에도 차력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짧은 기사였지만 몹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름 모를 차력사에 대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떤 외모를 가졌을지 부터가 궁금했다. 대머리에 강인하고 험상궂은 인상일까? 아니면 작지만 차돌처럼 단단하게 생겼을까? 추재기이에 나온 차력사의 공연은 차돌깨기였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차력사가 짊어지고 온 검은 빛깔의 차돌을 하나씩 꺼내놓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사람들이 충분히 모였다 싶으면 차력사는 공연을 시작했다. 왼손의 둘째와 넷째 손가락 위에 차돌을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위를 감쌌다. 그리고 오른손 주먹으로 내리치면 차돌 한 가운데가 쩍 갈라져버렸다. 수십, 수백 번을 하도 실패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간혹 의심을 한 구경꾼들이 차력사의 차돌을 가져다가 끌이나 도끼로 내리쳐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게 한바탕 실력을 보여주고 난 후에 부서진 차돌들을 챙겼는데 어떤 것들을 가져가고 어떤 것들은 남겨 놨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력사가 돌을 끓여먹기 위해 가져간 것이라고 수근 거렸다. 도교의 신선 술 가운데 돌을 끓이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한 것 같다. 이 사람이 30년 전까지 길거리나 시장 통에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한바탕 차력 쇼를 하고 정체불명의 약을 팔던 이들의 조상임이 분명하다.

    18세기의 조선, 특히 한양에서는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길거리 스타들이 존재했다. 재담꾼과 구기꾼, 전기수를 비롯해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까지 제각각 실력을 뽐내면서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안겨줬다. 차력사의 공연은 앞서 얘기한 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안겨줬을 것이다. 기록으로만 보면 차력사가 길거리에서 차돌만 부수고 간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여러 명이 팀을 이룬 채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약이나 다른 물건들을 팔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차력사들의 공연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들이 파는 약이 가짜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들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한 나머지 신선 술을 쓰는 신기한 능력자로 봤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조선 후기의 문집들을 많이 읽어봤지만 차력사를 다루는 것은 현재로서는 추재기이가 유일하다. 그것은 다른 공연보다 더 거칠고 험악했기 때문에 점잖은 양반들로서는 다루기 어려웠을 수 도 있고, 차력사 자체가 다른 공연을 하는 이들보다 희귀했을 수 도 있다. 어쨌든 조선의 다양한 길거리 공연들 중에서 차력사가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구경꾼들로 하여금 신선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 7 min
    31. 물맛을 감별하다. 수선

    31. 물맛을 감별하다. 수선

    과천에 살던 평범한 백성이 물의 신선이 된 과정과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어릴 때 부모와 일가친척을 모두 잃은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분제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노비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현상은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결국 노비들을 대체할 고공(雇工)이라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머슴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노비가 아니라 고공이었다. 과천의 백성도 머슴이나 고공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순조 14년인 1814년, 대기근이 들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어지던 시기 유독 큰 가뭄과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이는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이때도 흉년에 쌀값이 크게 뛰고 일거리가 없어지자 가난했던 그는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이판사판으로 칼을 들고 도적이 됐지만 그는 심성이 착했는지 그냥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사는 걸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용히 죽기로 결심한 그는 관악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간 곳에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샘물이 두 개 있었다.

    계곡으로 들어간 그는 두 개의 샘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바람과 햇빛을 쬐었다. 그리고 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는데 그를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이 밥을 주면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에 밥을 구걸하는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샘물로 달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번갈아가면서 물을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을 물만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그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크게 풍년이 들면서 곡식 값이 떨어지고 일거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면서 그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전에는 먹는 일로 크게 고생을 했다가 각곡방(却穀方)을 배워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다시 품을 팔아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그가 말한 각곡방은 벽곡법이라고도 불리는 도교의 수련법으로 곡식 대신 솔잎 같은 것을 먹는 수련법을 말한다. 그가 산 속에서 도인을 만나서 깨우침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하고 물을 마시다가 그리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물로 배를 채우고 굶주림을 느끼지 않았는데 언뜻 보면 얼토당토않지만 최근에도 술이나 특정 음식만 먹는 기인들이 있는걸 보면 무작정 거짓말로 치부하기는 애매하다. 어쨌든 이렇게 물로 배를 채우는 동안 본의 아니게 능력이 하나 더 생겼는데 바로 물맛을 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물을 마시면 이게 우물에서 퍼온 것인지 샘에서 떠온 건 지, 아니면 강물을 가져온 것인지 귀신 같이 맞춘 것이다. 고기나 김치도 아니고 물에 맛이 있다는 얘기가 상당히 낯설게 들리겠지만 물들도 토질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을 본 사람들은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바로 물의 신선이라는 뜻의 수선(水仙)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능력자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가 마침내 한양의 어느 판서 귀에까지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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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나무꾼 시인. 정봉

    30. 나무꾼 시인. 정봉

    18세기 접어들면서 학문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중인들이 글을 읽고 노비들이 시를 짓는 일이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여항문인(閭巷文人)이라고 일컬었는데 여항은 일반 여염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항문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아마도 양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모습에 하층민들은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원래부터 글공부를 해야 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과는 달리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었다. 정봉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초부라고 불렸고, 당대 사람들 역시 정 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봉의 원래 신분은 양근,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양반집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신분이 세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모 모두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총명한 머리 덕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마 오다 가다 주인마님이나 도령이 책을 읽는 것을 귀담아 듣다가 바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주인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자기 자식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글 솜씨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으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양근 땅에 사는 나무꾼 시인이라고 알려졌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은거하고 있는 진짜 고수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식이었다. 조수삼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투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외모와 이름, 그리고 출신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주인집에 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글 솜씨가 아까워서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사는 외거노비로 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배 한척을 구해서 양근과 동호(東胡), 그러니까 오늘날 동호대교가 있는 옥수동의 나루터를 오가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연명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한양을 오가게 되면서 정 초부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가 이 시는 아마 땔감을 팔러 오가던 동강의 풍경을 읊은 것이리라

    東湖春水璧於籃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白鳥分明見兩三 눈에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楡櫓一聲飛去盡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夕陽山色滿空潭 노을 아래 산 빛깔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이 시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의 그림 위에 쓰는 시문인 화제(畫題)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도화서 화원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가 자신의 그림에 시를 남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지은 시들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거침없이 노래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들은 한양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가 계층을 떠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노론 양반들로 구성된 시회인 동원아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일약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처럼 당대의

    • 8 min
    29. 길거리 협객2. 장오복

    29. 길거리 협객2. 장오복

    우리는 종종 TV나 뉴스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거나 모두 외면하는 일에 나서는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저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세상이 살만하다고 흐뭇하게 생각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영웅들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았다. 장오복 역시 앞서 소개한 김오흥 같이 길거리 협객이었다. 김오흥이 배를 모는 강대사람이었다면 그는 한양의 관청에서 일하는 경아전이었다. 나름 공무원이긴 하지만 항상 양반인 상관에게 무시와 구박을 당하는 계층인데 그것 때문에 협객을 자처했는지도 모르겠다. 경아전에 나름 힘깨나 썼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힘센 권력가의 비서실장격인 청지기 노릇을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길을 가다가 싸움판이 벌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구경했다. 그러다가 강한 쪽이 힘을 믿고 약한 쪽을 윽박지르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우기면 중간에 끼어들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유리한쪽이 눈을 부라리기 마련이지만 장오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가면서 결국 사과를 받아내도록 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서 길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장오복이 온다고 소리쳐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힘이 없어서 이리저리 시달리던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자 큰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그는 한양에 살면서 이런 저런 일화들을 남겨 놨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광통교를 지나가는데 때마침 건너편에서 건너오는 보교(步轎)와 마주쳤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보는 가마인데 여주인공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타고 다니는 뚜껑이 달리고 사방이 막혀있는 형태다. 가마에는 가마꾼 뿐 만 아니라 시종하는 인원들이 제법 많았다. 좁은 다리 위라서 장오복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깨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마꾼이 그를 밀쳐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장오복은 발끈 성을 내고는 차고 다니던 칼을 뽑아들고는 소리쳤다.
    “천한 가마꾼 놈들이 이리 기세를 떠는걸 보면 분명 가마 안에 탄 계집 때문이렸다.”
    그리고는 칼을 휘둘러서 가마의 밑바닥을 찔렀다. 보교의 밑바닥은 보통 소가죽을 깔아놨기 때문에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고 아마도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교 안에 있던 요강에 맞아서 큰 소리가 나고 말았다. 보통 여인들이 타는 보교 안에는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이를 깐 작은 요강을 넣었는데 여기에 맞은 모양이다. 요강에 맞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가마의 주인공이 문제였다. 그녀는 검계를 토벌한 장붕익의 손자인 장지항의 애첩이었다. 할아버지인 장붕익처럼 무관이었던 그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비롯해서 어영대장등을 지낸 고관이었다. 협객이라고 자처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일개 아전에 불과한 그가 건드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나 따를까 보고를 받은 장지항은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앞으로 끌려온 장오복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배포 좋게 대꾸했다.
    “당신이 위에 있어서 나라가 평안하고 제가 거리에 있어서 다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내대장부는 오직 장군과 저 밖에는 없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천

    • 10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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