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Everyday Morning Devotions], 요한복음

Chi Hyun Kim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매일의 삶의 예배에서 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이뤄냅시다. Through morning devotions each day, let’s live our daily lives as worship and walk with God. Rev. Chi Hyun Kim. (Th.M; Old Testament Theology) Full Gospel Somang Church

  1. 9시간 전

    요한복음 7.37-39 생수의 근원 예수, 그리고 나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초막절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에 예수님께서 외치신 말씀을 다룬다. 초막절의 7일차에 시행되던 물 붓기 의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비와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를 구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을 붓는 의식을 보며 하나님이 주실 생명과 구원, 성령을 기대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절정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성전의 의식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리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한 종교적 위로나 일시적인 갈증 해소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생명을 채울 수 없는 존재다. 세상의 물로 잠시 목을 축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근원적인 갈증은 해결할 수 없다. 성전의 물 붓기 의식이 생명과 구원을 상징했다면, 예수님은 그 상징이 가리키던 참된 실체가 자신이심을 드러내신다. 참된 생수, 곧 성령은 성전 의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선포된다. 우리도 목마름을 느낄 때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다른 물을 찾을 때가 많다. 인정, 성공, 관계, 돈, 안정감, 종교적 습관으로 내 안의 갈증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잠시 갈증을 잊게 할 수는 있어도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에게 더 많은 의식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을 믿는 자에게서 성경이 말한 것처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생수는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의 근원은 언제나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아 생수의 강처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된다. 참된 믿음은 내 갈증만 채우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께 받은 생명은 내 안에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생명은 값싼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열린 구원의 선물이다. 성령은 예수님 없이 따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영광 받으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 없이 능력만 구하는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성령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예수님께로 더 깊이 이끌고 예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뜨거운 감정이나 특별한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 생수를 마시고, 그 생명이 내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 즉 삶 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내 목마름을 가지고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물로 내 갈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목마른 자를 부르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물을 찾아 헤매는 삶을 멈추고,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영광 받으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받은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수를 마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How? 1) 인정, 돈, 관계, 안정감으로 내 갈증을 채우려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기 2) 성령 충만을 구할 때, 내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생명이 내 삶에서 흘러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3) 내 안에 고인 신앙이 아니라 흘러가는 신앙으로 살기 3)-1 받은 은혜가 있다면, 혼자 간직하는 것에서 주변에게 나누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 Bernard, J.H.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Edinburgh: T&T Clark, 1928. Boismard, M.E. Du Baptême à Cana: (Jean 1,19 - 2,11). Lectio Divina 18; Paris: Les Edition du Cerf, 1956. 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 Dodd, C.H.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Cecily Hastings, Francis McDonagh, David Smith, Richard Foley.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0분
  2. 3일 전

    요한복음 7.31-36 '나중에'는 위험해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한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이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겠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는 무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있다. 같은 예수님의 표적을 두고도 누군가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그분을 제거하려 한다. 예수님의 행위는 그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증언하지만, 그 증언 앞에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표적은 믿음을 낳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완악한 자들의 적대감을 더 드러내기도 한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내 기준과 질서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불편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내 삶을 위로하고 도와주실 때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분이 내 생각과 계획을 깨뜨리실 때는 마음속에서 그분을 밀어내려 한다. 결국 문제는 예수님의 표적이 부족한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예수님의 행위가 드러내는 그분의 정체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내 기준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부하느냐에 있다. 그런 적대감 앞에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신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아랫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운명은 사람들의 음모나 종교 지도자들의 체포 시도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간은 인간의 분노와 계획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움직인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기준을 준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반응과 상황의 압박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를 반대하는지, 어떤 환경이 나를 막는지, 어떤 문제가 나를 붙들고 있는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사람의 시선과 상황의 위협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때를 더 신뢰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 열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지 않고,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믿지 않으면, 나중에는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는 시간이 올 수 있다.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은 결국 예수님이 계신 곳, 곧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나중에”라는 말이다. 나중에 회개하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겠다고 말한다. 본문은 예수님을 미루는 것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불신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실 때 듣고, 지금 부르실 때 반응해야 한다. 믿음은 언젠가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계신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가서 가르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계시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땅의 차원에서만 예수님을 이해했다. 예수님의 정체는 그의 이동 경로나 출신을 따진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 오해는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땅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 내 종교적 안정감을 지켜 주는 분, 내 필요를 채워 주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충분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자이시며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양심을 찌르기에 마음속에서 그분을 밀어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지금 부르실 때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언젠가 다시 찾으면 된다고 미루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땅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계획에 붙들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내 생각과 기준 안에 가두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미루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지금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믿음이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미루지 않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How? 1) 믿음의 동역자와 선배들과 대화하며 하나님에 대한 식견 넓히기 1)-1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는 것 2) ‘나중에 해야지’ 대신 “오우 이거 개꿀잼이네?”하고 지금 시작하기 2)-1 개꿀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하고 시작하는 것 3)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위해 매일 아침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기 3)-1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적고 실천하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 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 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 Martyn, J. Louis. History and Theology in the Fourth Gospel. The New Testament Library 3 ed.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Meeks, Wayne A.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the Johannine Christology.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4; Leiden: E.J. Brill, 1967.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0분
  3. 4일 전

    요한복음 6.66-71 “너희도 가려느냐”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뒤의 장면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기대하던 방식과 달라지고, 더 이상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을 포기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끝까지 머물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 질문은 단순히 제자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질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은 끝까지 중립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많은 제자들이 떠난 것처럼 열두 제자도 떠날 수 있다. 표적을 보았다는 사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 제자의 무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끝까지 예수님께 머무는 믿음을 저절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은 떠나는 자가 되든지, 남는 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 이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8절) 베드로가 붙든 것은 더 쉬운 길도 아니고, 더 많은 떡도 아니고, 더 큰 표적도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도 예수님께 남을 수 있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 때문에 남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기에 남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예수님이 내 기대에 맞아떨어질 때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내 욕망을 꺾고, 내가 원하던 길과 다른 길로 이끌 때에도 그 말씀만이 생명을 주는 말씀임을 믿고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이 믿음이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님을 단순한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거룩하신 구원자로 인정하는 놀라운 고백이다. 예수님께 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공동체 안에 남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께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영생의 말씀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시며,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갈 곳이 없다는 고백이 참된 제자의 고백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참되고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된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셨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귀라고 말씀하신다. 가룟 유다는 열둘 중 하나였고,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으며, 제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예수님을 팔 자였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자리 가까이에 있어도, 욕심과 불신실함이 사람을 배반의 길로 끌고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앙의 자리, 직분, 공동체 안의 소속이 참된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다에게 속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택한 열둘 가운데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알고 계셨다. 사람은 겉모습과 소속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누가 진정으로 자신께 속했는지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끝까지 머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도 예배의 자리에 있고,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예수님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실 때, 내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떠날 수 있다. 겉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어도, 실제로는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질 때 떠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믿고 남는 사람인가? 나는 신앙의 자리와 직분과 익숙한 종교생활로 나를 안심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해 똑같이 던져진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에 대한 중립적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 말고 누가 우리의 구원자이겠습니까?”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시기에, 우리는 떠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그분께 머무는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한 제자도의 길을 어떻게 삶 속에서 걸어갈 수 있을까? How? 1) 세상이 나를 억까해도,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기 1)-1 오직 영생의 말씀, 생명의 떡은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얻자 2) 날마다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2)-1 늘 새롭게 아침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 힘을 얻어야 함(사 50:4) 2)-1 아침묵상을 못하더라도 최소 성경 어플에서 띄워 주는 말씀 한 구절 읽기 3) 내 ‘욕심’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지 않기 3)-1 매일 아침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3)-2 내 욕심을 점검하고 그 위에 말씀을 선포하자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 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0분
  4. 5일 전

    요한복음 6.35-40 생명의 떡, 예수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35절) 앞에서 무리들은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떡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참된 떡이 물질이나 기적의 산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깊은 결핍, 곧 하나님을 알고 생명을 얻고자 하는 근원적인 주림과 목마름이 예수님 안에서만 참되게 충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은 동시에 무리의 불신앙을 드러낸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았고, 떡을 먹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참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표적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이끌려야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이 계속 채워 줄 떡에 더 마음을 두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경험하고,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보다 예수님이 내 필요를 얼마나 채워 주시는지에 더 민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 붙드는 기복 신앙일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지만, 단지 우리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보고도 믿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 앞에서도 구원의 주도권이 아버지께 있음을 밝히시며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신다. ‘내게 오는 자는 아무도 내쫓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는 다 예수님께로 올 것이며,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 사람은 밀어낼 수 있고, 공동체는 쫓아낼 수 있으며, 내 죄와 연약함은 나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유도 분명하다. 예수님은 자기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 그 뜻은 예수님께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내 감정의 상태나 결심의 강도에만 달려 있지 않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순종 안에 붙들려 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삶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붙드는 삶이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 영생은 먼 미래에만 주어지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떡으로 내 삶을 채우려는 자리에서 돌이켜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 붙드는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님 자신께 나아가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떡만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내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지 말고, 다른 떡을 붙들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붙드는 삶은 어떤 것인가? How? 1) 복‘만’을 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기 1)-1 복을 구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복만’을 구한다면 잘못된 것 2) 내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얼굴 가리지 않기 2)-1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자를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심을 기억하기 3)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Borgen, Peder. "Observations of the Midrashic Character of John 6." ZNW 54, no. 3-4 (1963): 232–40. 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1분
  5. 6일 전

    요한복음 6.28-34 하나님의 일 = 예수님을 믿는 것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무리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이 질문은 얼핏 신앙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머물러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단단한 오해를 뒤집어 엎으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하나님의 일은 여러 종교적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무리의 관심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공로주의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가’라는 신뢰의 관계로 단숨에 옮기신다. 그럼에도 무리는 곧바로 다시 표적을 요구한다. 이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한다.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 자신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보다, 자기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증거를 먼저 요구한 것이다. 즉, 모세보다 더 크다고 주장한 예수님에게 모세보다 더 큰 표적을 이룸으로 스스로 증명하라는 뜻임. 그들의 주장에 예수님은 그들의 성서 오독을 바로잡으신다. 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며 아버지께서 현재 하늘에서 참된 떡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참 떡’이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 참된 떡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말한다. 하지만 무리는 예수님의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참된 생명의 떡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을 듣고도 그들이 구한 것은 여전히 자기 필요를 계속 채워 줄 지상의 떡이었다(34절).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묻는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물론 순종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신앙을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쌓아야 할 업적, 내가 증명해야 할 열심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일보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더 붙들게 된다. 또 우리는 무리처럼 계속 표적을 요구할 때가 많다. 이미 말씀을 들었고, 이미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면 믿겠다고 말하고, 내 필요가 채워질 때에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붙드는 신앙일 수 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떡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내 종교적 성취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내가 원하는 표적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떡만을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행위와 열심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또한 끊임없이 더 큰 표적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는 걸음은 어떤 삶인가? How? 1) ‘공로주의’를 내려 놓고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 회복하기 1)-1 하나님은 내게 어떤 일을 해내기보다, 자신과 깊이 교제하길 원하신다 2) 자판기 신앙 버리기 2)-1 내 요구만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묻기 3) 콩고물보다 진정한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시선을 두기 3)-1 삶 속에서 늘 ‘기도’가 선행되는 삶을 사는 것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 Borgen, Peder. "Observations of the Midrashic Character of John 6." ZNW 54, no. 3-4 (1963): 232–40. 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 Russell, D.S.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200 Bc - Ad 100. The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64.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0분
  6. 6월 7일

    요한복음 6.1-15 내 계산에 예수님이 있는가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기적이 아니다. 본문은 인간의 계산과 욕망을 드러내고, 그 한계를 넘어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 사건이 유월절 가까이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유월절은 출애굽과 광야의 만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절기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스스로 먹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 앞에서 빌립에게 묻는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방법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빌립의 대답은 매우 충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빌립이 예수님을 계산 안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을 내놓았지만, 그 계산 안에는 예수님의 풍성한 공급이 없었다. 안드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데려왔지만, 곧바로 말한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는 작은 가능성을 예수님께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보지 못했다. 빌립과 안드레는 모두 현실을 보았지만, 현실을 넘어 일하시는 예수님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값싼 보리떡 다섯 개를 들어 축사하시고, 무리가 원하는 만큼 먹게 하셨다. 부족함은 예수님의 손에서 풍성함이 되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기적의 크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 하나도 버려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생명의 수여자이심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표적을 본 무리의 반응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곧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 줄 왕이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자신들의 배고픔과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무리에게 붙들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권위와 왕권은 군중의 열광이나 인간의 야망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의 욕망이 만든 왕좌에 앉지 않으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신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결핍과 위기 앞에서 먼저 계산기를 두드린다. 내 돈, 내 시간, 내 능력, 내 경험, 내 가능성을 따져 보고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그 계산 안에 예수님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 아니라 불신앙의 계산일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무리처럼 예수님을 내 욕망의 왕으로 삼으려 할 때가 많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배를 불려 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 계획을 이루어 줄 분으로만 붙들려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풍성히 채우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욕망에 이용당하는 분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주님을 내 뜻대로 움직여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주님이 행하시는 생명의 표적 앞에서 내 계산기를 내려놓고,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 손에 있는 것이 보리떡 다섯 개처럼 작아 보여도, 그것을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공급하시든, 그분이 생명의 주이시며 참된 왕이심을 신뢰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부족함 앞에서 예수님을 계산 안에 넣고 있는가, 아니면 내 한계만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내 욕망을 이루어 줄 왕으로 붙들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참된 왕으로 믿고 있는가? 오병이어의 표적은 부족함의 자리가 절망의 자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 자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보게 되는 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과 야망을 내려놓고, 우리를 먹이시고 보존하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셔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계산과 야망을 내려놓고, 우리를 먹이시고 보존하시는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How? 1) 현실적 제약에 갇혀 주님의 능력을 내 계산 밖으로 제외했던 불신앙을 회개하기 1)-1 앞으로의 계산에 ‘예수님’을 넣어야 함. 2) 내 손에 쥔 ‘보리떡’을 주님께 드리기 2)-1 초라해 보여도 내가 가진 시간, 재능, 섬김 하나를 정해서 주님께 드리기. 3) 주님을 내 욕망을 채울 ‘수단’으로 조종하려는 이기심 내려놓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 Audet, J.-P. "Esquisse Historique Du Genre Littéraire De La "Bénédiction" Juive Et De L'"Eucharistie" Chrétienne." Revue Biblique 65, no. 3 (1958): 371–99. Dodd, C.H.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Guilding, Aileen. The Fourth Gospel and Jewish Worship.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0. Martyn, J. Louis. History and Theology in the Fourth Gospel. The New Testament Library 3 ed.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Newbigin, Lesslie. The Light Has Come: An Exposition of the Fourth Gospel.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2.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3분
  7. 6월 4일

    요한복음 5.41-47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 특히 랍비들의 불신앙의 원인을 낱낱이 폭로한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히 준수한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실태를 지적하신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절). 그들이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도, 자기 이름으로 오는 랍비들은 쉽게 영접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43절). 바리새파 랍비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인간적 전통을 내세웠고, 그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결국 유대인들이 갈망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서로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 것”(44절) 한 마디로, 그들은 인간의 평판과 종교적 연대를 갈망한 것이다. 문제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고 있었고, 모세를 존중했으며, 종교적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이어지지 않았다.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모세를 의지한다고 말했지만 모세가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실태는 그들이 목숨처럼 의지하던 모세의 율법 앞에서 완벽한 반전을 맞이한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마지막 날에 자신들을 변호해 줄 ‘변호사’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모세가 너희를 고발하는 검사(45절)라고 선언하신다. 그들은 기록된 모세의 ‘글’조차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기에, 생생하게 선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모습은 당연한 결과였다(47절).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유대인들과 똑같이 ‘상호 영광’의 성을 쌓고 있는지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에 목을 맨다.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내 종교적 위신이 유지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내 기준을 뒤흔드는 주님의 날카로운 말씀 앞에는 마음을 닫으면서도, 내 위선을 가려주는 세상의 소리와 사람들의 칭찬에는 너무나 쉽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자리에 머무는 한, 참된 믿음은 자라날 수 없다. 사람의 평판을 채우려는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이 결여된 불신앙일 뿐이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세상이 보내준 박수갈채도, 우리가 붙들고 있던 종교적 껍데기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겨온 익숙한 전통과 안전장치들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우리의 완악함을 고발하는 뼈아픈 증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열 사람의 칭찬 열 마디가 아닌,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단 한 번의 인정과 칭찬이다(cf. 요 5:44). 신앙은 사람의 시선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본질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결단이다. 우리는 사람의 평판에 일희일비하기를 멈추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려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오직 주님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서,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는 참된 경외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불신앙을 깨부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칭찬만을 구하는 순종의 삶을 어떻게 일궈낼 수 있을까? How? 1) 서로 칭찬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정도 함께 구하기 1)-1 오직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했다면 회개하기 2) 하나님의 말씀을 입맛대로 수정하지 않고 내 마음을 찌르는 대로 순종하기 2)-1 말씀 앞에서 변명하지 말 것 3) 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내 입으로 칭찬하기 3)-1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말하며 높여드리는 것(= 영광 돌리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 Schmiedel, P.W. "John (Son of Zebedee)." In Encyclopædia Biblica, edited by T.K. Cheyne, J. Sutherland Black, 2503–62.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1901. Strack, Hermann L., and Paul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Vol. 2, München: C. H. Beck, 1924.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1분
  8. 6월 3일

    요한복음 5.24-30 의로운 하나님의 뜻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신학의 핵심인 ‘현재적 생명’과 ‘미래적 부활’ 그리고 그 생명과 심판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권한을 잘 보여준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단순히 죽은 뒤에나 받는 미래의 막연한 약속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신다. 즉, 이미 완료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먼 미래를 위한 종교적 보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이주하는 확정된 은혜다. 예수님의 음성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지금’ 살려내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도 모두 그 음성을 듣고 무덤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때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마지막 날 영원한 부활과 심판의 권한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본문에서 놀라운 부분은, 이 거대한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자기 뜻대로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심판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의로운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도권을 주장하지 않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만을 온전히 구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2천년 전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 정죄의 심판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선물 받은 자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생명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의 방식에 묶여 있을 때가 많다. 세상의 환경에 쉽게 불안해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내 뜻과 내 계획대로 상황이 통제되지 않으면 쉽게 원망하고 흔들린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주도권을 악착같이 내려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모든 권한을 가지셨음에도 철저히 스스로를 비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작은 힘과 좁은 판단을 가지고도, 내 뜻대로 상황을 조작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움직이려 들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자의 삶은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급해하는 삶이 아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청종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내 삶의 방향과 의지를 온전히 맞추어 가는 삶이다. 참된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나 종교적인 언어에 머물지 않고, 참 생명을 얻은 사람다운 선하고 거룩한 열매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듣고 있는가? 나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답게 당당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내 뜻을 붙들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내 삶의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리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유일한 생명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자기 뜻이라는 우상에 붙들려 무기력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이미 얻은 영생을 오늘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누리는 자답게,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로 전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생명의 부활로 주님 앞에 설 자답게, 오늘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얻은 영생을 누리며,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How?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 시간 중 1분 기다리기 2) 불안, 원망, 통제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나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다”라고 고백하기 3) 오늘 하루 힘들더라도 10번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 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 Cullmann, Oscar.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Translated by Shirley C. Guthrie, Charles A.M. Hall.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59.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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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매일의 삶의 예배에서 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이뤄냅시다. Through morning devotions each day, let’s live our daily lives as worship and walk with God. Rev. Chi Hyun Kim. (Th.M; Old Testament Theology) Full Gospel Somang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