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인(人) 말씀묵상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1. 1시간 전

    고린도후서 4장 1-18절

    댓글 창 요약 어제 바울은 새 언약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며 변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아니”합니다(4:1). 그는 속임으로 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를 드러냈을 뿐입니다(4:2). 그래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말합니다(4:4).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했습니다(4:5).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도 빛을 비추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4:6). 이어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 보배는 질그릇에 담겨 있습니다(4:7). 그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싸이지 않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4:8~9). 그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집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지요(4:10~11). 그는 믿기 때문에 말합니다(4:13).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기도 다시 살리실 줄을 압니다(4:14). 그래서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4:16).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의 환난은 가볍고 잠깐입니다. 장차 올 영광은 무겁고 영원합니다(4:17~18).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4:1) 묵상 포인트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이 장은 같은 말로 시작하고 같은 말로 마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4:1, 16). 바울에게는 낙심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고린도에서 그의 사역은 의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담대함은 자기 힘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직분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받았습니다. 긍휼로 시작된 사역은 긍휼로 지켜지는 법입니다. 열매가 작아 보일 때 우리는 메시지를 바꾸고 싶어집니다. 말씀을 부드럽게 다듬고, 교묘한 방법을 찾습니다(4:2).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면 빛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4:3~4). 그리고 가려진 눈은 하나님만 여실 수 있습니다. 창조의 첫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어둠 속에 빛이 비쳤습니다(창세기 1:3).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도 똑같이 하셨습니다(4:6).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주로 전하고, 예수를 위하여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4:5).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4:6) 질그릇에 담긴 보배 바울 시대에 질그릇은 흔하고 값싼 그릇이었습니다. 쉽게 금이 갔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이라는 보배를 바로 그런 그릇에 담으셨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 하나님께서 연약한 사람들을 택하신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금 간 곳을 감추려고 애씁니다. 연약하면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생각은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4:8~9). 압박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말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고, 바로 그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4: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연약함은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장 분명하게 보는 곳이 거기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7)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바울은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4:13).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말할 힘을 줍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야기의 끝을 압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4:14).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4:16).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은 누구나 느낍니다. 몸은 쉽게 지치고, 힘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선교지에서나 강단에서 오랜 세월을 쏟아부은 분들은 이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환난을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부릅니다(4:17). 그런데 이 편지 뒷부분에서 그는 매 맞고, 파선하고, 굶주리고, 잠 못 이룬 일들을 늘어놓습니다(11:23~28). 결코 작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난이 가벼워진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저울에 함께 올려놓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느냐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4:18).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삶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4:16) Support the show

  2. 1일 전

    고린도후서 3장 1-18절

    댓글 창 요약 어제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물었습니다(2:16). 오늘 그 답을 줍니다. 고린도에는 바울이 참 사도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추천서를 들고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에게도 그런 추천서가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3:2). 고린도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입니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쓴 편지입니다(3:3). 바울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3:5). 하나님께서 그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두 직분을 견줍니다. 모세의 직분은 돌에 새겨졌고 분명한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게 하고 정죄하는 직분이었고, 그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영의 직분은 의와 생명을 가져오고, 그 영광은 길이 있습니다(3:7~11).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3:16). 그리고 우리는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봅니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되지요(3:18).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3:5) 묵상 포인트 그리스도의 편지 바울은 자기 경력을 내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린도 성도들을 가리켰습니다. 변화된 그들의 삶이 바울의 추천서였습니다. 그 편지조차 바울이 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쓰셨고, 바울은 전했을 뿐입니다. 붓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었고, 종이는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3:3). 하나님은 오래전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에 새기시고, 돌 같은 마음 대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주님을 섬기는 우리 안에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조용한 압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직함과 열매와 사람들의 인정을 추천서처럼 모읍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지금 쓰고 계신 편지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날마다 그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3:2).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3:3) 율법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3:6).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고 말합니다(3:7). 율법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돌에 새긴 율법은 우리 죄를 보여 줄 수는 있어도 새 마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생명은 오직 영이 주십니다. 그리고 영의 직분은 의를 가져옵니다(3:9). 복음을 알고 난 뒤에도 우리는 다시 율법 조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이 지켜야 할 목록이 되고, 사역이 보여 주어야 할 성과가 됩니다. 내 힘으로 기준에 맞추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율법 조문이 다시 우리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죄책감과 비교와 탈진이 찾아오지요. 답은 더 애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3:5~6). 그분의 영광은 옛 영광보다 크고, 없어지지 않습니다(3:10~11).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3:6) 수건을 벗은 얼굴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3:13). 바울은 지금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수건은 공부나 노력으로 벗겨지지 않습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3:14).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벗겨집니다(3:16). 주님은 그 일을 성령으로 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3:17).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수건이 있습니다. 부끄러워서 숨기도 하고, 두려워서 숨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내 모습의 일부만 보여 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 앞에 서라고 초대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영광을 봅니다.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3:18). 이 변화는 더디지만 분명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변화가 아닙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주께로 돌아가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3:18) Support the show

  3. 1일 전

    70년대 통기타 5: 구주여 광풍이 불어

    댓글 창 구주여 광풍이 불어 [Verse 1] 구주여 광풍이 불어 큰 물결이 일어나 온 하늘이 어둠에 싸여 피할 곳을 모르니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 때 주무시려 합니까 [Chorus]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Verse 2] 구주여 떨리는 내 맘 저 풍랑과 같아서 늘 불안에 싸여서 사니 날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풍파가 나를 삼키려 합니다 지금 죽게 된 날 돌아보사 곧 구원해 주소서 [Chorus]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Verse 3] 사나운 광풍이 자고 큰 물결이 그치니 그 잔잔한 바다와 같이 내 마음이 편하다 구주여 늘 함께 계셔 떠나지 마소서 복된 항구에 즐거이 가서 그 언덕에 쉬리라 [Final Chorus]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잔잔해 잔잔해 Support the show

    70년대 통기타 5: 구주여 광풍이 불어
  4. 1일 전

    AI가 읽어주면

    댓글 창 책을 읽지 않고도 독후감을 쓴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교실의 풍경 EBS 다큐멘터리K 독자생존은 한국의 고등학교 교실에서 출발합니다. 독서 진로 발표 시간. 아이들은 각자 책 한 권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합니다. 발표는 자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책을 끝까지 읽은 학생, 손 들어 볼까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독후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AI에게 책 내용을 요약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반 정도 읽다가 멈추고 나머지는 AI에 맡겼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고력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뭔가 생각하는 게 줄어든 것 같아요." 이것은 아이들을 탓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속도와 효율의 압박 속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잃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뇌가 조용해질 때 뇌과학 다큐멘터리는 MIT 미디어랩으로 이동합니다. 연구자 나탈리야 코스미나(Nataliya Kosmyna) 박사와 동료들은 54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에세이 작성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세 집단으로 나눠 각각 ChatGPT, 검색 엔진, 그리고 아무런 도구 없이 쓰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뇌 활동을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스스로의 기억과 사고만을 사용했을 때 뇌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전두엽, 측두엽, 후두엽 등 여러 영역이 유기적으로 협력했습니다. 검색 엔진을 사용한 집단은 그보다 적었지만, 정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시각 영역이 활발히 움직였습니다. 반면 ChatGPT를 사용한 집단의 뇌 연결성은 현저히 낮았습니다. 코스미나 박사팀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AI를 사용한 집단은 신경적, 언어적, 행동적 수준 모두에서 일관되게 낮은 수행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과제 후 자신이 쓴 문장을 인용할 수 있었던 비율도 세 집단 중 가장 낮았습니다. AI가 쓴 글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연구는 2025년 출판된 것으로, 논문의 저자들은 표본 크기와 실험실 조건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읽기와 쓰기가 사고를 형성한다. 그것을 위임할 때 우리는 사고 자체를 위임하게 됩니다. "정보를 내가 나의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것을 거쳤을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깊이 읽기 — 뇌가 기억하는 방식 인지과학 다큐멘터리는 프랑스의 인지신경과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엔(Stanislas Dehaene) 교수를 소개합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자 읽기와 뇌를 연구해 온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그는 읽기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글자를 해독하는 것과 의미를 깊이 처리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중에 무언가를 기억하느냐는, 처음 읽을 때 얼마나 깊이 처리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안에서 소개된 실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냥 읽었을 때보다 질문을 만들며 읽었을 때 기억 회상 점수가 더 높게 나왔습니다. 왜일까요? 질문을 만들려면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해는 나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그 과정 자체가 기억을 만들고, 사고를 형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학습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로 형성되는가의 문제입니다. 기술의 심장부에서 고전을 읽는 사람들 공동체 다큐멘터리는 흥미로운 장면을 포착합니다. 세계 최첨단 기술 연구의 중심지 MIT에서 학생들이 17세기 한국 고전 소설 구운몽을 읽고 있습니다. 시를 함께 쓰고 나누는 모임이 있습니다. 읽기는 AI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학생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결말만 읽으면 그 과정에서 스스로와 씨름하는 정신 훈련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어려운 텍스트를 마주했을 때 더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있게 됩니다. 또 다른 학생은 시를 쓰고 나누는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매주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마지막 모임 즈음에는 자신의 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과정이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뉴욕에서는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 열립니다. 한국에서는 북클럽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읽기는 혼자 하는 소비가 아니라 함께 하는 형성의 과정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형성한다 신학 읽기와 형성에 관한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개혁주의 신학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 다시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읽히고, 들리고, 묵상될 때 우리를 형성합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여기서 '묵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hāgâ)는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 즉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냥 훑어 읽는 것이 아닙니다. 뇌과학이 말하는 깊이 읽기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8문은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유익을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 답은 말씀입니다. 특히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성은 수동적인 소비가 아닙니다.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칼빈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말씀을 대신할 무언가가 생겨도, 말씀을 읽고 씨름하고 내면화하는 과정 자체가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 과정을 건너뛰는 것은 은혜의 수단을 건너뛰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이 지름길을 원하는가 내면 체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코치로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이 AI에게 독후감을 맡길 때, 내면에서 어떤 부분이 그 결정을 이끌었을까요? IFS(내적 가족 체계)의 언어를 빌리면, 그것은 관리자(manager) 부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간이 없고, 성적이 걱정되고, 실패가 두렵고,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현실적인 압박. 그 부분은 나쁜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자기(Self) 주도적인 삶은 그 관리자 부분이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즉 효율을 넘어 형성을 선택할 때 가능해집니다. 씨름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느려도, 그 씨름 안에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여기에 더 깊은 이유를 더합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원하면서도 지름길을 택하는 것은 타락한 본성의 일부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마음의 무질서(disordered loves)라고 불렀습니다. 은혜는 그 무질서를 천천히, 그러나 실제로 재배열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씀의 묵상, 공동체, 느린 읽기가 도구가 됩니다. "글자를 잇는 것은 단순한 일차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고,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독서 활동은 완전한 사유의 종합 선물 세트 같습니다."— 독자생존 인터뷰 참가자 · EBS 다큐멘터리K 독자생존 함께 읽는다는 것의 의미 공동체와 말씀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뉴욕의 공원에서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습니다. 한국의 북클럽에서 사람들이 읽은 것을 나눕니다. MIT의 시 모임에서 학생들이 함께 씁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독서 트렌드가 아닙니다. 인간이 고립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존재라는 사실의 반영입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해온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함께 읽고, 함께 듣고, 함께 나누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가 아닌 우리로 형성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은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읽기가 공동체 안에 뿌리를 내릴 때 그것은 단순한 지식 획득이 아니라 사랑의 훈련이 됩니다. AI는 빠릅니다. AI는 능숙합니다. 그러나 AI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AI는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과 함께 씨름하지 않습니다. 읽기가 형성이라면, 그 형성은 반드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Support the show

  5. 1일 전

    고린도전서 1장 1-11절

    댓글 창 요약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편지를 엽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꺼낸 주제는 ‘위로’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갈등하던 관계가 회복으로 돌아선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자신과 고린도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위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통 속에서 맛본 하나님의 위로를 자세히 진술하며 성도들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정체성을 자신과 교회에 연결합니다. 1년 6개월의 사역을 마친 이후(주후 52년),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요인들로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며 신뢰를 접기 시작했습니다. 둘의 관계는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을 만큼 위태로웠습니다. 에베소 사역 중에 두 번의 편지를 보내고, 디도와 디모데를 보냈으며, 직접 ‘고통스러운 방문’을 단행했지만 긴장과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눈물의 편지’를 디도 편에 보낸 후, 바울은 긍정적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며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마침내 디도가 기쁜 소식을 품고 돌아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3절) 묵상 포인트 넘치는 고난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감추지 않고 알립니다. 그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처럼 죽음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도는 이 고난의 이유를,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었다’고 밝힙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형상을 닮도록 하는 은총입니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도로 돕는 복음 공동체가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을 자기 부정과 겸손, 공동체 사랑의 경험과 주님 의지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절) 넘치는 위로 바울은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며,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합니다. 그 소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 넘치는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큰 것을 경험합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극적으로 구원을 받는 경험과 자신의 고난으로 교회가 맺는 열매 또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위로의 원천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위로를 경험하는 성도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방편은 다양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5절) 위로와 복음 공동체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환난 중에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여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자신이 겪은 고난과 위로가 모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았고, 자신이 받은 위로로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종을 친히 구원하시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삶으로 성도들을 위로한 것은 그들도 당한 고난을 의연히 감당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위로받은 위로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받은 치료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위로는 흐르고, 번지고, 스며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심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도 있지만 다른 이들을 세우기 위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4절)Support the show

  6. 5일 전

    70년대 통기타 7: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댓글 창 [Intro: solo acoustic blues guitar, slow 12/8, a soulful melodic phrase with blue notes] [Refrain: hushed, alone, almost to herself]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1: raw honest confession, guitar answers each line]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Refrain: warmer, 영광 할렐루야 turns toward light]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Interlude: blues guitar fill, soulful] [Refrain: heavier, deeper sorrow]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2: aching, a lump in the throat, every 오 주여 an outcry] 나 슬픈 일 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Refrain: reaching outward, earnest prayer]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Instrumental Break: featured blues guitar solo, soulful bends, slides, building] [Refrain: building strength, faith rising]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3: tense, facing the tempter] 저 마귀 유혹합니다 [Burst: full-voiced cry for victory, raw power, long held note, guitar strummed hard]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하소서 오 주여 [Final Refrain: strongest, triumphant faith, 영광 할렐루야 as the peak]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Outro: suddenly hushed, peaceful, held long] 영광 할렐루야 [End: blues guitar closes with a soft phrase, fades] Support the show

    70년대 통기타 7: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7. 10월 27일

    시편 18편

    댓글 창 요약 시편 18편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제왕적 감사시’ 혹은 ‘승리의 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 이 시편은 다윗의 파란만장했던 생애와 모든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쓰였습니다. 시인은 단순한 위기 모면을 넘어, 폭풍과 벼락을 대동하고 임하시는 우주적 왕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자가 되심을 웅장한 글로 묘사합니다. 사울의 추격을 비롯한 수많은 대적들의 위협을 이겨 내고 생애의 황혼기에 지난날을 회고하며 부른 신앙의 노래입니다. 문맥상 이 시편은 앞선 16편, 17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한 세트를 이룹니다. 16편이 죽음을 넘어서는 굳건한 신뢰를, 17편이 억울한 고난 속에서 의로운 판결을 구하는 탄원을 담았다면, 18편은 마침내 그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감사로 절정을 이룹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여호와만이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참된 창조주이시며, 고통받는 당신의 종을 위해 기꺼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 전능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절) 묵상 포인트 반석 다윗은 하나님을 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2절 한 절 안에서만 여덟 가지 이름이 쏟아집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내가 피할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다윗은 굴과 바위틈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삼상 22:1; 24:2). 그 바위는 몸을 숨겨 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다윗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노래합니다. 정말 나를 지켜 주신 분은 여호와셨다고. 눈여겨볼 것은 모든 이름 앞에 붙은 ‘나의’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만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따르던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고전 10:4). 땅이 흔들려도 우리는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딛고 선 반석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절) 부르짖음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다윗은 자신이 겪은 위기를 꾸미지 않습니다. 줄에 묶이고 물살에 휩쓸려 숨이 막히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이 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계획을 세운 것도, 자신을 변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잘 정돈된 기도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성전에서 들으셨습니다.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우리는 종종 마음이 정리되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정리되지 않은 울음도 하나님의 귀에 닿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도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히 5:7).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버림받은 자의 부르짖음을 우리 대신 지셨습니다(마 27:46). 그래서 오늘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아버지께 들립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절) 내려오시는 하나님 7절부터 장면이 바뀝니다.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가 요동합니다. 연기와 불, 흑암과 빽빽한 구름, 우박과 번개가 하늘을 채웁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시내산에 강림하시던 날을 떠올리게 합니다(출 19:16~18). 15절에서 물 밑이 드러나는 장면은 홍해가 갈라지던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출 15:8). 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온 우주의 왕이 움직이십니다. 그 한가운데 9절이 있습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하나님은 멀리서 도움만 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늘을 드리우시고 친히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눅 2:7). 다윗을 위해 하늘을 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곳에 있어도, 그분이 내려오지 못할 만큼 깊은 곳은 없습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9절)Support the show

소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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