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목사의 직설/直說

문경두

월전교회 목사 문경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천국에 가서 무엇 하고 살래?”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역시 대답을 제대로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톺아보겠습니다. --- · 문의/상담: 010-8618-1000 · 후원/농협: 060-02-192192 · 문경◯

  1. 7H AGO

    요한복음_33. 타는 목마름 때문에 | 사는 동안에 목마름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 타는 목마름 때문에 | 사는 동안에 목마름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 요한.7,37~44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신학적 담론 분석] 고착된 관념을 넘어 실재의 원천으로: 요한복음 7장과 πνεῦμα의 역동성 1. 서론: 차원의 충돌과 인식의 전환 요한복음 7장은 단순히 유대 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기록한 사료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고착된 관념'과 눈앞에 현존하는 '신성한 실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존재론적 사건의 현장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향해 자신들이 축적한 '과거의 정보'를 들이대며 그를 재단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부모와 출신지가 명확히 파악된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정보의 감옥에 갇힌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지식의 유무가 아닌, 실재를 대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육체적 혈통과 지리적 정보라는 낡은 관념에 매몰되어 있을 때, 예수께서는 **"나 있는 곳(ὅπου εἰμὶ ἐγὼ)"**이라는 선언을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나 있는 곳'이란 육체를 기반으로 소멸해가는 이 세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 존재하는 영적 실재의 차원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4장 3절에서 제자들에게 약속된 거처와 연결되며, 인식이 바뀐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드(Mode)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본 분석은 이 두 차원 사이의 간극을 살피고, 어떻게 관념의 성벽을 허물어 영적 실재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연결 문장: 고착된 관념이 실재를 가로막는 장벽임을 확인했다면, 이제 그 관념이 뿌리 내린 인간 인식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해부할 필요가 있다. 2. 고착된 인식의 함정: οἴδαμεν(오이다멘)과 "경험에게 길을 묻지 말라" 유대인들은 예수를 향해 "우리는 그를 안다(τοῦτον οἴδαμεν)"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의 완료형인 **'오이다멘(οἴδαμεν)'**은 과거의 인식이 현재까지 확고하게 굳어져 더 이상 수정이 불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정보에 기반한 교만'이며, 새로운 진리가 설 자리를 박탈하는 인식론적 폭력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오류는 신학적 무지를 넘어 실존적 파멸을 부릅니다. 소스 컨텍스트의 통찰처럼, 진리를 찾는 자는 "경험에게 길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경험은 과거의 산물일 뿐, 생동하는 실재의 이정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함정은 제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가룟 유다와 제자들은 각자 '정치적 메시아'라는 자기 관념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특히 유다는 예수가 자신의 관념과 충돌하자 즉시 그를 배반하는 참혹한 선택을 했습니다. 요한이 이들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관념'이 반드시 무너져야만 함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반면, 예수의 자기 인식은 **"나는 아노니(ἐγὼ οἶδα)"**라는 선언으로 대조됩니다. 이는 자신의 '출처'가 하나님임을 명확히 인지하는 존재적 투명성입니다. 출처를 망각한 유대인의 인식은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지할 때만 인간은 고착된 관념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연결 문장: 이처럼 굳어진 인식은 인간을 결핍의 상태로 몰아넣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갈증이라는 실존적 고통으로 이어진다. 3. 실존적 갈증과 욕망의 역설: 초막절의 배경과 인간의 한계 초막절 축제의 절정인 '큰 날(명절 끝날)'에 울려 퍼진 예수의 외침은 인간의 실존적 갈증을 정조준합니다. 유대인들은 7일간의 물 붓기 의식과 '큰 호산나의 날'을 지나, 8일째 되는 날 모든 의례를 멈추고 각자의 장막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종교적 의례가 남긴 공허와 죽음의 음모가 가득한 소란스러운 축제의 중심부에서 예수께서는 "에크락센(ἔκραξεν,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다)" 하셨습니다. 이는 육체적 갈증을 해소해주던 반석의 물(출 17장)을 넘어, 근본적인 실재의 생수를 마시라는 전복적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의 역설'을 목도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목마름의 구조와 동일하여, 해소되는 순간 더 큰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동력이자 고통의 원천이 됩니다. 소스 컨텍스트가 제시하듯, 현대의 제프리 엡스타인 사례나 사드 후작의 '소돔 120일'은 세속적 성취와 탐닉의 끝이 결국 파멸이라는 '중독의 섬'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돈과 명예를 거머쥔 자들이 끝없는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 세계'의 물로는 결코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집착의 포기를 넘어, 예수께서는 '원천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연결 문장: 일시적인 해갈을 반복하는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수가 솟아나는 근원적인 지점인 '배'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4. 생명의 원천: 영적 만족의 메커니즘과 κοιλία(코일리아)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의 **'배(κοιλία, 코일리아)'**에서 생수의 강(ποταμός)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코일리아'는 단순히 신체 부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부이자 본질적인 내면, 즉 생명의 자궁을 상징합니다. 이 생수의 흐름은 정교한 '영적 만족의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됩니다. 구약의 예언(사 12:3, 44:3, 58:11)을 통합해 볼 때, 구원(יְשׁוּעָה/Yeshua)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인 **영(Ruach/Pneuma)**이 살아나, 목마른 인간의 **혼(Nephesh/Psyche)**을 만족시키는 사건입니다. 즉, 성령(Pneuma)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Koilia)에서 흐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목숨(Psyche)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근본적인 만족에 도달하게 됩니다. 요한은 이 생수를 '성령'으로 해석하며, 그것이 예수의 '영광' 이후에 주어질 것임을 명시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곧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자기를 고집하는 관념을 십자가에 못 박는 철저한 '자기 부인' 없이는, 성령의 역동성은 우리 내면에서 발현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영광의 통로를 통과할 때에만, 인간의 본질적 중심부에서 마르지 않는 생수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연결 문장: 존재의 중심에서 영적 생수가 흐르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이 주는 분열과 쟁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실재에 발을 딛게 된다. 5. 결론: 실재를 사는 방법으로서의 지적 투명성과 자기 부인 요한복음 7장의 담론은 우리에게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 원천인가'를 묻습니다. 예수가 등장할 때 발생하는 **'스키스마(σχίσμα, 분열·쟁론)'**는 비극이 아니라, 거짓 평화 아래 숨겨진 진실(ἀλήθεια)이 드러나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세상의 고착된 관념을 찢고 들어오는 '거룩한 균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실재를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천의 내면화: 하나님을 아버지(출처)로 명확히 인식할 때, 생수의 원천은 외부가 아닌 우리 내면의 '코일리아'로 이동합니다. 이는 세상을 향한 구걸을 멈추고 존재의 풍요로움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지적 투명성의 회복: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이유는 그의 '인격적 투명성'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자신의 편견을 걷어내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용기입니다. 자기 부인의 단호함: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처럼, 과거의 정보나 육체의 관성에 휘둘리지 않는 명료한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자기 관념을 내려놓는 지적 겸손이자 최종적인 자기 부인의 행위입니다. 결국 기독교적 삶이란 고착된 관념이라는 감옥을 나와, 십자가라는 좁은 문을 지나,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흐르는 성령의 역동성에 자신을 맡기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욕망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마르지 않는 '그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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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EB 11

    요한복음_32. 자신의 근본을 생각한다면 | 예수님의 정체성과 ‘나’의 존재론

    · 자신의 근본을 생각한다면 | 예수님의 정체성과 ‘나’의 존재론 · 요한.7,25~36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예수님의 정체성과 진리의 실존적 본질 1. 서론: 자기 인식의 근본으로서의 종교와 출처(出處)의 문제 종교의 본질은 형이상학적 유희가 아닌 '자기 인식(Self-recognition)'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존재의 지향점을 결정짓는 인식론적 전제이며, 자신의 '근본(Root)'을 어디에 두느냐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전략적인 지표가 된다. 많은 현대인은 자신의 육체적 요구와 감정적 충동을 자아의 본질적 요구로 착각하는 실존적 비극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출처의 혼동'은 필연적으로 삶의 표류를 야기한다. 본고가 주목하는 요한복음의 텍스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 전환을 촉구한다. 그가 보여준 보통 사람과 다른 자기 이해의 핵심은 자신의 출처를 지상(Terrestrial)이 아닌 천상(Celestial), 즉 '하나님'께 둠으로써 존재의 기원을 이동시킨 데 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명명한 행위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철저히 하나님이라는 '출처(Source)'로부터 기인했음을 선포하는 혁명적 선언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기원 인식이 어떻게 성경 원어 분석을 통해 증명되며, 이것이 현대인의 실존에 어떠한 변혁적 가치를 던지는지 상세히 논증하고자 한다. -------------------------------------------------------------------------------- 2. 원어 분석 I: '사르크스(σάρξ)'와 '프뉴마(πνεῦμα)'의 이원적 기원론 요한복음 3장 6절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두 가지 상이한 기원을 대조하며 존재의 질적 단절을 명시한다. 이 구절에 나타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는 선언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기원의 불변성을 선포하는 존재론적 법칙이다. 원어적 분석: "나다(낳다)"를 의미하는 동사 **'게겐네메논(γεγεννημένον)'**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는 이미 발생하여 그 상태가 확정된 기원의 고착성을 의미한다. 이를 직역하면 "육체는 육체에서 나와 있고, 영은 영에서 나와 있다"가 된다. 즉, **'사르크스(σάρξ, 육)'**와 **'프뉴마(πνεῦμα, 영)'**는 각각의 출처가 질적으로 다르며, 육이 결코 영을 생성하거나 영으로 승화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임을 논증한다. 실존적 질문: 이러한 기원의 차이는 "나는 육체인가, 영인가?"라는 고질적이고도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육체의 요구를 자기의 요구로 착각하는 삶은 결국 사라질 것에 목매는 허무로 귀결된다. 본 텍스트는 인간이 영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원인 '영'으로의 회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신학적 평가: 영의 존재 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생존과 영생을 가르는 핵심이다. 육체적 기원에 고착된 자아를 부인하고 영적 기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영원한 존재의 본질로 진입할 수 있다. -------------------------------------------------------------------------------- 3. 원어 분석 II: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와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를 통한 예배의 재정의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규정하는 정언명령이다. 존재론적 선언: "하나님은 영이다"라는 표현은 서술어가 주어보다 먼저 나오는 강조 구문('πνεῦμα ὁ θεός')으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 자체가 '프뉴마'임을 천명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영적인 분이 아니라 영 그 자체이시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재정의: 흔히 '진리'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관념적 개념이 아니라 **'사실(Fact)'**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종교적 열심이나 추상적 신념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사실의 태도'다. 사실의 능력이 거세된 종교는 허구적 관념으로 전락하며, 인간 존재의 본디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를 통한 비판: 예배를 뜻하는 이 단어는 **'~을 향하여(πρός)'**와 **'입맞추다(κυνέω)'**의 합성어다. 이는 예배가 특정 장소에 모이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태도'임을 시사한다. 대중적 집회와 형식에 치중하는 한국 교회의 예배 관행은 이러한 원어적 본질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된 예배는 '사실'과 '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태도의 회복이다. 예수의 존재 가치는 인간이 상실했던 '사실의 능력'을 회복시켜 본디 영적인 자아를 일깨우는 데 있다. '사실의 삶'이야말로 육체의 요구를 거두고 영을 살려내는 유일한 경로가 된다. -------------------------------------------------------------------------------- 4. 유대 당국자의 관념적 신앙 vs 예수의 현실적 하나님 인식 요한복음 7장에 나타난 예수와 유대 당국자('아르콘테스, ἄρχοντες') 및 예루살렘 민중 간의 갈등은 '관념(Ideal)'과 '사실(Fact)'의 치열한 충돌을 보여준다. 정보적 앎(οἴδαμεν) vs 경험적 앎(οἶδα):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오이다멘(οἴδαμεν)'**이라고 말한다. 이는 과거에 습득한 정보(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등)에 고착되어 그것이 현재의 인식까지 장악한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오이다(οἶδα)'**라고 선언하며, 이는 밀접한 사귐과 삶의 경험을 통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앎을 뜻한다. 관념의 함정: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신비롭게 와야 한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Ideal)을 신봉했다. 그들은 눈앞에 현존하는 '사실'인 예수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구축한 '관념'을 선택했다. 이러한 관념적 신앙은 실재하는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현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현실적 존재가 아닌 '염원과 소망의 범주'에 가두어두는 행태와 맥을 같이 한다. 전략적 지침: 신앙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관념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수용하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는 기복적 수준에 머물게 된다. 예수의 '외침(ἔκραξεν)'은 관념에 갇힌 종교 기득권층을 향한 강력한 항거이자, 사실에 근거한 본질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폭로였다. -------------------------------------------------------------------------------- 5. 결론: 현대 신학 교육 및 신앙 현장을 위한 학술적 제언 본 보고서의 분석을 종합할 때, 현대 신학 교육과 신앙 현장이 회복해야 할 전략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존재의 안정은 오직 '영(πνεῦμα)'이 우선순위를 가질 때 가능하다. 요한삼서 1장 2-3절의 분석에 따르면, 영혼으로 번역된 **'프쉬케(ψυχή)'**는 영(pneuma)이 아닌 '혼' 혹은 '목숨'을 의미한다. 영이 제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혼(프쉬케)이 안정을 찾고 범사가 잘되는 평안의 질서가 확립된다. 현대 신학은 모호한 '영혼'의 개념을 넘어, 원어적 구분에 근거한 영의 우선적 통치를 강조해야 한다. 둘째, 신앙의 본질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사야 55장 6-7절이 역설하듯이, 인간의 관념적 생각(악인의 길과 불의한 자의 생각)을 폐기하고 하나님의 사실(알레데이아)로 복귀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시급한 과제다. 셋째, 사라질 육체의 요구(비근본)에 목매는 신앙을 경계하고, 영원한 본질인 영을 살려내는 '사실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출처의 명확성'과 '사실에 근거한 하나님 인식'은 현대 기독교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신앙 능력의 블루프린트(Blueprint)다. 본 보고서에 제시된 원어적 통찰과 실존적 분석이 신학 교육의 질적 도약과 성도들의 본질적 회복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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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EB 4

    요한복음_31. 믿음과 욕망 | 이익에 눈먼 사람의 세계

    · 믿음과 욕망 | 이익에 눈먼 사람의 세계 · 요한.7,14~24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서론: 당신의 마음은 정말로 열려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마주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벽을 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말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 글은 약 2000년 전의 기록인 요한복음 속 예수와 유대인들의 논쟁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 심리, 편견, 그리고 믿음의 본질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탐구합니다. 이 고대의 텍스트는 단순한 종교적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다음 5가지 흥미로운 포인트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을 외면하는지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먼저 평가한다 당신의 '믿음'은 사실 '욕망'일 수 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의 진짜 의미 규칙에 갇히면 정신을 잃는다 진짜 앎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된다 -------------------------------------------------------------------------------- 본문: 5가지 핵심 통찰 1. 우리는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먼저 평가한다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쳤을 때, 사람들의 첫 반응은 그의 메시지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배경'에 집중했습니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갈릴리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의 가르침 자체를 평가하기 전에 이미 그를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출신, 학력, 사회적 지위 등을 기준으로 사람의 의견을 미리 판단하는 '권위의 오류' 또는 '인신공격의 오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논리적 실수를 넘어섭니다. 소름 돋는 사실은, 이것이 자기를 지키려는 본능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서 나온 진실은 내가 쌓아 올린 세계관과 질서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지를 공격하는 대신, 손쉬운 방법인 메신저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합니다. 이 편견의 필터는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립니다. 2. 당신의 '믿음'은 사실 '욕망'일 수 있다 텍스트는 두 종류의 태도를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하나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전자는 사실 믿음의 옷을 입은 '욕망'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인정, 성공을 위해 믿음을 이용하며, 그것이 순수한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이익에 눈먼 사람은 결국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이미 마음속에 '믿고 싶은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진실도 그 견고한 욕망의 벽을 뚫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던지는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진정한 믿음이란 올바른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태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참되다'고 한 이유는, 그의 말과 행동에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에고가 사라진 텅 빈 공간에 비로소 진실이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3. "귀신 들렸다"는 말의 진짜 의미 논쟁이 깊어지고, 유대인들은 예수의 논리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되자 극단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바로 "당신은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학적 진단이나 분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사용하는 가장 손쉬운 '지적 포기'이자 '배척의 언어'입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을 때, 그 사람 자체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대화의 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이 이 말을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에 불과합니다"라고 분석하듯, 이는 자신의 지적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일 뿐입니다. 이것은 단지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할 수 없는 상대를 향해 '비정상', '광신'과 같은 말로 쉽게 재단하고 대화를 차단해 버립니다. 4. 규칙에 갇히면 정신을 잃는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을 율법 위반이라며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는 그들의 논리적 모순을 파고듭니다. 바로 '안식일에 행하는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남자아이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날이 안식일이라면,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고서라도 할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하나의 율법(할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율법(안식일)을 어겨야 하는 역설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반박이 천재적인 이유는 단순히 모순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행위를 관통하는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할례와 병 고침, 이 두 행위 모두 '사람을 온전하게(건전하게) 하는 것'이라는 동일한 본질을 공유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상징적인 회복 의식(할례)은 존중하면서도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인간의 회복(치유)은 정죄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규칙이나 형식에 얽매여 더 큰 가치와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5. 진짜 앎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편견과 욕망을 넘어 진실을 알 수 있을까요? 텍스트는 진정한 앎(헬라어: 기노스코, γινώσκω)은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쌓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리고 이 앎에 도달하기 위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스스로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생각과 확신의 가구들을 스스로 들어내어 텅 빈 공간을 만들 때, 비로소 진리가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의 여정뿐만 아니라, 삶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 적용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자신의 옳음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 결론: 당신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살펴본 5가지 통찰은 결국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편견, 채우고 싶은 욕망,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맹목적인 규칙에 사로잡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00년 전의 이 짧은 논쟁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글을 닫기 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당신은 메시지를 들었는가, 아니면 메신저만 보았는가? 당신이 굳게 믿고 있는 그것은 진정한 믿음인가, 혹은 단지 나의 욕망이 걸친 옷은 아닌가?".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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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JAN 28

    요한복음_30.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없음에 대하여

    ·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없음에 대하여 · 요한.7,1~13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요한복음의 '때'(카이로스)와 유월절: 초막절을 넘어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길 서론: 오해의 장막과 신적 시간의 계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둘러싼 깊은 '오해'의 드라마를 그려낸다. 제자, 가족, 종교 지도자,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대중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거의 모든 집단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수를 오해했다. 그들은 예수를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시킬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 곧 유대인의 '왕'(마쉬아흐)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오해의 장막 한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선언하신다. 이 선언은 단순한 시간의 유예가 아니라, 세상의 기대를 거스르는 신적 시간표, 즉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도래를 예고하는 중대한 신학적 발언이었다. 본 에세이는 요한복음 7장을 중심으로, 당대의 그릇된 메시아 사상과 예수의 자기 인식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분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왜 형제들이 제안한 초막절의 화려한 무대가 아닌, 유월절의 희생 제사를 자신의 결정적 '때'로 선택하셨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초막절의 유보와 유월절의 성취라는 요한의 문학적 대조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를 밝히고, 십자가야말로 예수의 사명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1. 시대적 요청과 어긋난 기대: 정치적 메시아를 향한 열망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며, 민족을 구원할 강력한 지도자, 즉 기름 부음 받은 '왕'(마쉬아흐)을 간절히 갈망했다. 이러한 정치적 해방에 대한 염원은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오해의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다양한 집단이 예수를 이 틀 안에서 해석하려 했으며, 이는 결국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이러한 세속적 기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께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권유한다(요 7:3-4). 이들의 제안은 예수의 신적 사명을 세속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의 프레임에 가두려는 근본적인 ‘범주 오류’를 드러낸다. "결국은 나타나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그들의 논리는, 예수를 ‘이 시대에 대성할 스타’로 만들려는 세속적 야망에 불과했다. 요한이 이들의 권유가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 7:5).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 만한 능력은 믿었지만, 그 왕이 걸어야 할 자기희생의 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종교 기득권층은 예수를 극도로 경계하고 배척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 규정 위반이나 신성모독과 같은 종교적인 것이었다(요 5:18). 그러나 안식일 규정이나 신성모독과 같은 명분은, 그들의 실제적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종교적 핑계에 불과했다. 그들의 진짜 두려움은 예수께서 백성의 지지를 얻어 왕으로 추대될 경우, 자신들이 유지해 온 사회 질서와 기득권이 무너지고 로마 당국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에 있었다.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공회 앞에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요 11:50)고 외친 것은, 종교의 이름 뒤에 숨겨진 냉혹한 정치적 본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발언이다. 이처럼 모든 기대가 '지상의 왕'이라는 하나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에,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여시는 예수의 방식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선 존재론적 충돌을 예고했다. 이 충돌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세상의 시간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선포하신 예수의 '때' 개념에 있다. 2. 세상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선포 예수께서 형제들의 권유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고 답하신 것은, 단순한 시간 지연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세상이 요구하는 시간표(크로노스)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른 시간(카이로스)을 따르겠다는 강력한 신학적 선언이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이다. 이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으며 인간의 계획과 활동이 이루어지는 보편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καιρός):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시기(時機)' 또는 '시즌(season)'을 가리키는 질적인 시간 개념이다. 이는 인간의 역사(크로노스)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때이다. 예수의 형제들이 제안한 초막절의 '때'는 전적으로 '크로노스'적 관점에 속한다. 그들에게 초막절은 수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절호의 기회, 즉 인간적인 계산으로 성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라는 인물을 성공의 무대에 올려 자기 현시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는 철저히 '카이로스'에 속한다. 그분의 때는 인간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자기희생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 '카이로스'는 다름 아닌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희생 제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정점에 이르는 단 한 번의 거룩한 순간이었으며, 그 희생의 궁극적 의미와 승리는 부활을 통해 확증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때'를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공생애 전체가 인간의 계획이나 대중의 요구가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신적인 시간표에 따라 진행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3. 두 개의 명절, 하나의 길: 초막절의 유보와 유월절의 성취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 사역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개의 중요한 명절, 즉 초막절과 유월절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이는 단순히 두 절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구원 비전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초막절의 무대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유월절을 기다리신 선택은,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신학적 행위였다. 초막절: 국가적 영광의 무대와 예수의 거부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는 축제로, 국가적 승리와 역사적 영광을 기념하는 화려한 축제의 장이었다. 수많은 순례객이 예루살렘에 모여 환호하는 이곳은 예수의 형제들이 보기에 완벽한 정치적 데뷔 무대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르셨다.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그분은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요 7:10)고 기록된다. 이는 대중의 환호와 정치적 기대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심으로써, 자신이 세상이 기대하는 방식의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 행동이었다. 아직은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나발을 불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월절: 구속사적 희생의 제단과 예수의 성취 예수께서 자신의 '때'로 삼으신 유월절은 초막절과 완전히 다른 신학적 지평을 연다. 유월절의 핵심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희생과 구원이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 근원적 구원 사건이다. 이 절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규모 희생 제사가 거행되었고, 하루에 수만 마리의 양이 죽어 나갔다. 성전 뜰은 제사장들이 뿌리는 희생 제물의 피로 가득했다. 바로 이 유월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다. 요한에게 이 두 사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라, 이스라엘 구원사 전체를 완성하는 신학적 필연이었다. 성전에서 수많은 양이 죽어갈 바로 그 시간에,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림이 딱 겹치는’ 순간이었다. 이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가 예표했던 실체가 성취되는 순간이었으며, 그 자체로 실로 ‘어마어마한 상징’이었다. 예수께서 초막절의 영광을 피하고 굳이 유월절의 고난을 기다리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의 정치적 왕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백성을 구원하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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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JAN 21

    요한복음_29.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알고 나면

    ·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알고 나면 · 요한.6,60~71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소개: 갈림길에 선 제자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 칭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육체의 일에 있었기에,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자들 중 여럿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실망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텅 비어가는 자리를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두 제자에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 1. 뜨거운 사랑의 고백 수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는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바로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대답은 흔들리는 제자 공동체를 붙잡는 외침과도 같았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완벽한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를 신학적으로 정립된 믿음의 선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급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순간 예수님을 떠날 수 없다는 절실함,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습니다'라는 결단 이전에 '그러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해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앞으로 닥쳐올 거센 시험을 통과하며 더 깊은 차원의 믿음으로 정련되어야 했습니다. -------------------------------------------------------------------------------- 2. 세 번의 부인: 무너져 내린 사랑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운명의 밤, 대제사장의 뜰은 불안과 긴장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다른 사람들과 섞여 곁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의 사랑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 여종이 불빛 사이로 그를 알아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즉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부인했습니다. 잠시 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다시 알아보며 갈릴리 사람이라고 지목하자 그의 불안은 극에 달했습니다. 생존의 공포 앞에서 그의 뜨거웠던 고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전부였던 스승과의 관계를 필사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가 세 번째로 부인하는 바로 그 순간,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말씀을 그의 기억 속에 예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75) 베드로의 이 통곡은 단순한 후회나 비겁함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스승을 배반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고통의 절규였습니다. 그의 눈물은 역설적으로 그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처절한 실패의 순간은 그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3. 세 번의 질문: 사랑을 믿음으로 세우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실패하고 좌절한 베드로에게 다가가 특별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나 능력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의 가장 근원적인 마음을 세 번에 걸쳐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을 세 번의 사랑 확인으로 덮어주는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무너진 마음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시려 했습니다. 이 대화는 베드로의 여정 중심에 있는 깊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바로 그의 믿음은 산산조각 났을지언정,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만큼은 진실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불완전한 믿음이 아닌, 변치 않는 그 사랑을 새로운 사명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믿음을 보충한다는 사실과 함께,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부족한 믿음이라도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서신서에서 고백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을 온 삶으로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큰 실패와 죄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덮이고 회복되는 기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 4. 결론: 사랑으로 완성되는 믿음 시몬 베드로의 여정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교훈을 남깁니다. 믿음은 한순간의 완벽한 지적 동의나 결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하여 실패와 회복을 거쳐 성장하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뜨거운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처절하게 실패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기반으로 다시 일어서 초대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따랐던 가룟 유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유다는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실패했을지언정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회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여기고 온전히 '먹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여 그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여정의 출발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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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JAN 14

    요한복음_28.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삽니다 |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을 어떻게 알까

    ·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삽니다 |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을 어떻게 알까 · 요한.6,52~59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 당신이 놓치고 있던 3가지 충격적 통찰 서론: '믿음'이라는 익숙한 단어에 숨겨진 비밀 익숙함은 경이로움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우리 입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기에, 우리는 그 말의 무게와 기이함을 느끼기 위해 멈춰 서는 법을 잊곤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내뱉는 이 고백이 사실은 온화한 동의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야만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 글은 요한복음 6장을 통해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안락한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충격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한 표현을 마주하며, 그 안에 숨겨진 신앙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합니다. 이 여정을 통해 당신의 믿음이 지적인 동의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존재를 뒤흔드는 실제가 되어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1. 기적의 함정: 왜 군중은 예수를 오해했는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군중은 열광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워준 예수를, 그들은 이 땅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 곧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의 열광은 신적인 것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제시한 '영생'이 아닌, 당장의 '먹을 것'과 '배부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을 얻어 먹어 그것으로 배부른 까닭이다." 이 지적은 그들의 믿음이 철저히 자기중심적 욕망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폭로합니다. 이 오해는 단지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은 현세의 문제 해결과 개인적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군중의 생각을 단지 교정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부수셨습니다(깨부수셨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는 이 파괴의 행위는, 비단 과거의 군중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신앙인이 진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본질적인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당신 자신을 가리켜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빵이다 ...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 살리는 빵이다, 생명을 살리는 빵이다. -------------------------------------------------------------------------------- 2. 믿음이 아니라 '섭취'다: 당신은 예수를 '먹고' 있는가? '믿는다'는 행위와 '먹는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믿는다'는 것은 종종 지적인 동의나 관념적 수용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대상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해줍니다. ‘내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따르고, 아닐 것 같으면 외면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는, 일종의 거래적 관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앙이 바로 이 수준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먹는다'는 행위는 선택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완전한 소화와 동화(同化)의 과정입니다. 음식은 내 안에서 분해되어 나의 살과 피가 되고,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여기에는 거리두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먹는 행위는 존재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욱 충격적이고 물리적인 단어를 선택하셨습니다. 단순히 '먹다(φάγω, 파고)'를 넘어, '우걱우걱 씹어 먹다(τρώγω, 트로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그냥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살을 뜯고, 뼈를 으스러뜨리듯 씹어 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중하고 지적인 믿음이라는 모든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토록 노골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 한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현대의 '장기이식' 비유는 이 개념의 일부를 설명해 줍니다. 누군가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심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강력합니다. 장기이식은 부분적인 결합이지만,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내 안에서 완전히 분해되어 유기적으로 재결합하는 총체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 하나님과의 관계, 그 존재 전체를 내 것으로 오롯이 받아들여 '그로 인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섭취攝取’입니다. 먹는 거예요.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 3. 기념이 아닌 '실제'다: 의식(儀式)을 넘어선 존재의 참여 많은 사람에게 성찬식은 과거의 사건을 엄숙하게 돌아보는 '기념'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개념을 과거라는 안전지대에서 끌어내어 우리의 현재라는 현실 한복판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것은 추모의 의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생생한 '존재의 참여'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는 나를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지금 내 안에 거하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이 마주한 비극입니다. 수많은 신앙인이 성찬식이라는 '기념 행사'에 경건하게 참여하고는, 돌아서서 이전과 아무런 변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이 정보와 지식, 혹은 종교적 의식에 머물러 있을 뿐, 삶의 '실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단단히 붙어 수액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듯이, 우리의 삶 역시 예수님과의 '생명의 관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첫 번째 통찰에서 보았던 군중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자기중심적 관념과 욕망'을 깨부수는 행위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세상의 가치관과 이기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내고, 하나님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실제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무리와 제자를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결론: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는 세 가지 충격적인 통찰을 마주했습니다. 첫째, 자기중심적인 기대를 깨부수는 것에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둘째, 진짜 믿음은 거리를 둔 동의가 아니라 예수를 내 존재로 삼키는 '섭취'입니다. 셋째, 신앙은 과거를 기념하는 의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수와 연합하는 '실제'입니다. 결국 신앙의 본질은 예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 그분과 '일체화(一體化)'되는 것입니다. "고기도 씹어 보아야 맛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은 그 안에 직접 참여하여 살아볼 때만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정점에 이르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저 예수를 '믿는' 관념으로 안전하게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먹고' 소화하여 그로 인해 살아가는 위험하고도 영광스러운 '실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 · https://youtube.com/@moon.moksha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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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JAN 7

    요한복음_27.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 요한.6,41~51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에게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언에 담긴 구체적인 핵심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일시적인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대조: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 이를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 신성한 기원과 권위의 표명: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는 인간적인 배경으로만 보았으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이며 오직 자신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은 유일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 희생을 통한 생명 부여: 예수님은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을 넘어,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겠다는 구속사적인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마다 예수께로 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믿고 영생을 소유하도록 초청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칭하신 것은 육체적 허기를 채우는 양식을 넘어, 믿는 자에게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밥을 먹어야 하듯, 영적인 생명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공급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삶의 본질과 구원에 대한 신학적 탐구이다. 핵심 주장은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시적인 삶과,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영생)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군중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를 현실적인 문제(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적 메시아, 즉 왕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며 영생의 길을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핵심 충돌은 경험적·인간적 지식에 기반한 세상적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영적 인식 사이의 대립이다. 진정한 '믿음'은 단순히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예수와 같은 생각으로 삶의 동력을 삼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문서는 일시적인 삶에 집착하면 오히려 그것을 잃게 되며, 자신의 삶(σάρξ)을 하나님의 뜻에 내어놓을 때 비로소 죽음을 넘어선 참된 생명, 즉 영생을 얻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이는 예수 자신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준 구원의 방법론이다. -------------------------------------------------------------------------------- 주요 주제 분석 1. 두 가지 삶의 대립: 물질적 생존과 영원한 생명 본문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물리적 생존을 위한 삶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이다. • 일시적 양식: 만나와 오병이어 ◦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음식이었지만, 그것을 먹은 조상들도 결국 죽었다. ◦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의 기적 또한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 사건이었으나, 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는 일시적 방편이었다. ◦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양식 모티프'의 일부로, 완전한 양식에 대한 기대를 주는 예표(豫表)이자 그림자 역할을 한다. 이들은 '내재적 불완전성'을 지니며, 그 자체로 영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 영원한 양식: 생명의 떡이신 예수 ◦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요 6:51)이자 "생명의 떡"(요 6:48)이라고 선언한다. ◦ 이는 만나와 오병이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양식이다. 예수를 '먹는 것', 즉 믿는 것은 일시적인 육체의 생명을 넘어 '영생'을 얻게 한다. ◦ 예수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말하며, 믿음이 곧 죽지 않는 길임을 명시한다. 2. 메시아 개념의 충돌: 세상의 왕과 하늘의 구원자 군중이 예수를 따랐던 동기와 예수가 제시한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괴리가 존재했다. 이는 '메시아'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 유대인의 현실적 메시아관 ◦ 유대인에게 메시아(히브리어: ָמִׁשיַח, 마쉬아흐)는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인 구세주가 아닌, 모세와 같이 백성을 이끄는 현실적 지도자, 즉 '왕' 또는 '임금'을 의미했다. ◦ '마쉬아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본래 제사장(아론)에게 행해지던 의식이 왕(사울, 다윗)에게 이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라는 개념으로 굳어졌다. 다윗은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מִׁשיַח יְהוָה)"라 칭하며 해하지 않았다. ◦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중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예수가 자신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 즉 왕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의 전환 ◦ 이스라엘은 본래 왕이 없이 사사(士師)가 다스렸다. 사사는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워 그 뜻을 수행하는 지도자였다. ◦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아들들(요엘, 아비야)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등 타락하자, 백성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했다. 이는 사무엘의 실책이 원인이었으나, 성경은 이를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행위(삼상 8:7)로 기록한다. ◦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유대인들의 '왕'에 대한 갈망과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강화했다. 이스라엘의 주요 사사 (사사기 등장 순)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며, 엘리 제사장도 사사로 포함되기도 한다. 3. 믿음의 본질: 경험적 지식에서 온전한 신뢰로 본문은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인간적·경험적 앎과 신적 계시에 대한 신뢰를 대조한다. • 경험에 갇힌 인식 ◦ 군중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라며 수군거렸다. ◦ 이는 자신들이 아는 경험적 사실(예수의 출신과 부모)에 근거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인간적 관념이 예수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 현대인 역시 '내가 생각하는 이 삶이 전부'라는 관점에 매여, 자신이 판단한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 참된 믿음의 정의 ◦ 참된 믿음은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는 말씀처럼,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1. 먹는 행위: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 것, 즉 '믿는 것이 곧 먹는 것'이다. 2. 생각의 일치: '예수님과 생각이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3. 삶의 동력: 예수님을 '삶을 사는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4. 온전한 위탁: 내가 살려는 노력을 멈추고 '살리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는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4. 영생의 길: 자아 포기와 하나님의 주권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기는 근본적인 전환을 통해 얻어진다. • 자기 생명을 버리는 역설 ◦ 예수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고 가르친다. ◦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원어는 일시적 목숨을 의미하는 '프쉬케(ψυχή)'이며, '영생'은 참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ζωή)'와 관련된다. ◦ 이는 "내 인생을 내가 붙잡고 살려고 하면 오히려 낭패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오롯이 맡기고 살면 그때 비로소 제대로 산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 기준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예수의 살(σάρξ)이 제시하는 길 ◦ 예수는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고 말한다. 여기서 '살'은 원어로 '사르크스(σάρξ)'이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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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2/31/2025

    요한복음_26. 동상이몽/同牀異夢_2 |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는가

    · 동상이몽/同牀異夢_2 |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는가 · 요한.6,22~40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우리가 예수님께 거는 기대와 예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같은 침대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牀異夢)'**과 같이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믿음의 목적: 나의 욕구 충족 vs 하나님의 뜻 수용 • 자신의 기대: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의 생각보다는 **'나의 기대감'**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신앙을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예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 하나님의 생각: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영생(eternal life)**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님)를 믿는 것, 즉 예수님과 생각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2. 추구하는 양식: 썩을 양식 vs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 자신의 기대: 군중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고 자신들을 먹여 살릴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기적 그 자체나 배를 채워줄 육체적인 양식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 하나님의 생각: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병이어나 만나 같은 기적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인 하나님을 보게 하려는 **표적(sign)**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양식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인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삶의 가치와 평안: 세상의 기준 vs 하나님과의 동행 • 자신의 기대: 사람들은 흔히 돈이나 권력,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평안을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 곁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습니다. • 하나님의 생각: 진정한 잘 삶이란 자기가 정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분의 이치(로고스)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먼저 구할 때 먹고 사는 문제는 자연히 따라오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기대는 이 땅에서의 결핍을 채우는 데 머물러 있지만, 예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바다에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노를 젓는 것과, 등대의 불빛(표적)을 보고 항로를 수정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나의 기대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난 참된 믿음의 본질: '동상이몽(同牀異夢)'을 넘어 영원한 삶으로 · 동상이몽/同牀異夢_2 |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는가 · 요한.6,22~40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I. 서론: 문제 제기 -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본문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군중 사이의 근본적인 인식의 간극, 즉 '동상이몽(同牀異夢)' 현상을 신학적으로 분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열렬히 따랐지만, 그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해는 예수님의 행적이 가리키는 '표적(σημεῖον)'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썩을 양식'에만 집중한 데서 비롯되었다. 먼저 군중의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믿음의 동기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교정, 즉 '참된 양식'과 '영생'으로의 초대를 고찰할 것이다. 요한 신학이 제시하는 영생의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를 밝히고, 궁극적으로 현대 기독교인에게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II. 군중의 오해: 썩을 양식을 좇는 믿음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참된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군중의 믿음이 왜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들의 오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그토록 혁명적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전제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나선 동기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을 얻어 먹어 그것으로 배부른 까닭이다" (요 6:26) 이 말씀은 군중의 관심이 기적이 가리키는 영적인 실재,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에 있었음을 명확히 지적한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영생의 근원을 본 것이 아니라, 굶주림을 해결해 줄 공급자를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기대는 그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ὁ προφήτης)"(요 6:14)로 인식하고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던 행동(요 6:15)에서 드러난다. 이는 과거 광야에서 만나를 경험하게 한 모세와 같은 정치적·물질적 해결사를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아 사상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에게 광야의 만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증하는 '최대의 표적'이었고, 그들은 오병이어 기적에서 바로 그와 같은 표적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왕국을 꿈꾸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동상이몽'이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기적'과 '표적(σημεῖον)'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군중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에 열광했지만, 그 기적이 가리키는 예수님이 바로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는 '표적'의 의미는 깨닫지 못했다.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요 2:11)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표적'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조명하며, 독자들에게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라고 촉구한다. 결론적으로 군중의 믿음은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자기중심적 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에게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오해에 직면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의 시선을 땅의 양식에서 하늘의 양식으로 돌리신다. III. 예수님의 교정: 참된 양식과 영생으로의 초대 예수님께서 군중의 물질적이고 피상적인 요구를 어떻게 심오한 가르침으로 전환시키시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믿음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시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요한복음 6장을 이해하는 중심축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기대를 단호하게 교정하시며,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대조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 6:27) 예수님의 관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얻은 떡은 물론이고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거룩한 만나조차도 결국 죽음에 이르는 '썩을 양식'에 불과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허기를 채울 수는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목마름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현세적 필요를 넘어, 삶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라고 촉구하셨다. 이에 군중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을 대답으로 제시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 6:29) 신앙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이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과 생각이 같아지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적인 초대에 대한 응답이다. 이 논의는 예수님의 장엄한 자기 선언에서 정점에 이른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Ἐγώ εἰμ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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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교회 목사 문경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천국에 가서 무엇 하고 살래?”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역시 대답을 제대로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톺아보겠습니다. --- · 문의/상담: 010-8618-1000 · 후원/농협: 060-02-192192 · 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