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신년교사강습회 주제강의] 주제 : 용서받은 나, 사랑하는 우리 성경 : 이사야 55:7, 에베소서 4:31-32 일시 : 2026년1월 9일 순천동부교회회 강사 : 평화의길벗_라종렬목사(순천노회 교육훈련부 상임총무, 광양사랑의교회) [도입] 회색 점표가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선생님 여러분, 반갑습니다. 2026년 새해를 맞아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소명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의를 시작하며 그림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맥스 루카도의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무 사람 '웸믹'들은 서로에게 늘 스티커를 붙여줍니다. 재주가 뛰어나거나 칠이 잘된 웸믹에게는 번쩍이는 '금별'을, 실수를 하거나 칠이 벗겨진 웸믹에게는 칙칙한 '회색 점표'를 붙입니다. 주인공 펀치넬로는 늘 회색 점표만 받는 친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이 '웸믹들의 마을' 같지 않습니까? 숨 가쁜 경쟁과 차가운 개인주의로 가득 찬 ‘거친 광야’와 같습니다. 아이들은 성적과 외모, 가정 환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 세우기 속에서 서로에게 '금별'과 '회색 점표'를 붙입니다.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작은 상처에도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깊은 ‘단절’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온몸에 회색 점표를 붙인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어디에서 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영적 가뭄의 위기 앞에 제110회기 총회는 “용서, 사랑의 시작입니다”라는 준엄하고도 자비로운 요청을 우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교육부의 주제는 “용서받은 나, 사랑하는 우리’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심리적 기술이나 매끄러운 처세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숨 쉬게 하는 ‘창조적 사랑’의 극치이며, 죄로 인해 얼어붙은 관계를 녹여내는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심장 박동’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붙들 두 말씀은 이 용서의 여정을 위한 완벽한 지도가 되어 줍니다. 이사야 55장 7절은 용서의 수직적 시작을 선포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은 용서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복의 귀환’에서 시작됨을 가르칩니다. 모든 치유는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한 걸음에서 출발합니다. 에베소서 4장 31-32절은 그 용서의 수평적 확장을 명령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수혜자’이기 때문입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는 지식 기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먼저 베푸신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아이들의 깨어진 마음 조각을 주님의 손길로 이어 붙이는 ‘화해의 사신’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존재’라는 감격을 회복하고, 성경이 보여주는 용서의 풍경 3가지 속으로 함께 깊이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1] 화폭에 담긴 하나님의 심장, 그 압도적인 은혜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장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성경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세 폭의 그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첫 번째 풍경: 탕자를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 (누가복음 15장)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최병성 목사님의 『복음에 안기다』는 복음을 "세상이 이해하기 힘든 경이로운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가 바로 그 경이로움의 절정입니다.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방황하던 아들이 아니라, ‘언덕 위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입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아들은 돌을 맞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죄'가 아니라 아들의 '없음'을 더 아파했습니다. 돼지 우리 냄새가 밴 채 돌아온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체면을 모두 내던지고 맨발로 달려가 목을 어긋맞겨 안았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과거의 수치를 덮는 은혜의 덮개였습니다. 손의 가락지는 깨어진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전적인 수용’의 증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셔서 당신의 품에 우리를 안으시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두 번째 풍경: 갈릴리 해변의 아침 식사 (요한복음 21장) 지거쾨더 부활 소망의 아침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의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의 현장인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셔서 조반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셨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당신은 바다에 많은 길을 내시어도에서 주님의 사랑을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다시 시작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숯불 앞에서의 아픈 기억을 따뜻한 아침 식사의 ‘치유의 기억’으로 덮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은 추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사랑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어, 그를 사명자로 다시 세우시는 ‘부드러운 재창조’의 과정이었습니다. 주님의 치유와 배부르게 하심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세 번째 풍경: 십자가의 기도 (누가복음 23장)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멜리데 성당 용서의 십자고상, 후렐로스의 글스도도 인간의 가장 추악한 증오가 쏟아지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침묵 대신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진정한 용서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자격이나 반성에 따른 보상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격 없는 자를 향해 먼저 생명을 내어주는 ‘고귀한 희생’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거대한 용서의 바다에 잠긴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타인을 정죄할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대신 사랑할 용기를 주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본론 2] 용서로 정의된 우리의 새 이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Doing)’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Being)’를 새롭게 정의하는 존재론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권위와 사역의 근원은 바로 이 새로운 이름에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Homo Dimissus,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자비라는 산소로만 숨 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교사의 진정한 권위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나 또한 가망 없는 죄인이었으나 오직 은혜로 용서받았다”는 처절하고도 감격스러운 겸손의 고백, 바로 그것이 우리를 교사 되게 하는 힘입니다. 저와 선생님들의 강단과 교실에서의 모든 권위는 바로 이 고백 위에 서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빛을 발합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두 번째 이름으로 이끌어갑니다. 바로 Homo Dimittens,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자신에게만 가둘 수 없습니다. 마치 댐의 물이 넘쳐흐르듯, 우리가 받은 용서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사랑으로 정화하는 ‘영적 필터’이며,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용서의 사명은 우리에게 세 번째 이름을 부여합니다. 바로 Homo Exspectans,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씩 일흔 번’의 용서는 숫자의 계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의미합니다. 아이들의 즉각적인 변화가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용서는 내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 아이의 영적 성숙을 묵묵히 지켜주는 ‘거룩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용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본론 3] 교실, '회복'의 숲을 가꾸는 법 이처럼 우리가 ‘용서받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면, 우리의 교실은 더 이상 죄를 심판하는 법정, 정죄와 배제와 혐오의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교실은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숲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