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사 주간지 《더 뉴요커》는 2026년 10월 26일 호에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다룬 장문의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오늘날 인공지능(AI)과 세계 경제, 안보의 향방이 대만의 TSMC와 네덜란드의 ASML이라는 극소수 기업에 달려 있다고 짚었습니다. 시니어 독자께서도 스마트폰과 자동차, 병원의 심장박동기와 신용카드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반도체와 무관한 일상이 없는 만큼, 이 이야기를 함께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사가 먼저 상기시키는 것은 1980년대 미국의 태도입니다. 일본 기업의 부상 앞에서 당시 미국 안팎에서는 감자칩이든 컴퓨터칩이든 같은 칩이 아니냐는 식의 자유무역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 태도는 값비싼 대가로 돌아왔습니다. 전 세계 첨단 칩의 절대다수가 대만에서 생산되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봉쇄할 경우 세계 경제의 충격은 상상을 넘어설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전쟁 첫해에만 세계 경제가 10조 6,000억 달러(약 1경 4,600조 원), 곧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분의 1을 잃을 수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시가총액이 약 2조 달러(약 2,760조 원)에 이르는 TSMC가 대만의 이른바 '실리콘 방패'로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칩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핵심은 빛입니다. 칩의 설계도를 마스크에 새기고 빛을 투사해 실리콘 웨이퍼 위에 회로를 찍어 내는 노광(리소그래피, lithography) 공정이 반도체 제조의 중심에 있습니다. 파장이 짧을수록 더 가는 선을 새길 수 있기에 업계는 오랜 세월 더 짧은 빛을 좇았고, 마침내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기술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술을 상용 장비로 완성한 곳이 ASML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용융된 주석 방울을 초당 6만 번 레이저로 쏘아 태양 표면보다 훨씬 뜨거운 플라스마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빛을 독일 자이스(Zeiss)의 극도로 매끄러운 거울로 모읍니다. 장비 한 대의 가격은 최대 4억 달러(약 5,500억 원)에 달하고, 구성 부품은 수백만 개에 이릅니다. 개발이 한창일 때는 고객사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출력에 머물러 납기를 7년이나 넘겼다고 하니, 이 기술이 얼마나 오래 인내한 끝에 얻어진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TSMC의 성취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1931년 중국에서 태어난 설립자 모리스 창은 1980년대 대만 정부의 요청으로 반도체 사업을 맡았고, 설계는 하지 않고 위탁 생산만 전담하는 파운드리(foundry)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자체 공장을 갖지 않는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대한 공장 건설비를 감당할 수 없던 설계 전문 기업들이 이 모델의 고객이 되었고, 엔비디아와 애플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됩니다. 기사는 TSMC의 경쟁력이 생산량이 늘수록 공정이 개선되는 학습 곡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수율(yield)을 끌어올리려는 집요한 관리 문화에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불과 몇 분의 장비 유휴 시간까지 아침 회의에서 점검하는 조직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산업이 개별 천재의 업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사는 ASML 설계도에 '파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지식이 전체 시스템에 흩어져 있으며, 문서로 남지 않은 숙련 기술자들의 손끝 감각이 공정을 지탱한다고 전합니다. 한 칩이 완성되기까지 국경을 70번 넘나들 수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고순도 폴리실리콘, 특수 석영, 웨이퍼,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가 각기 소수 기업과 소수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약 500억 달러(약 69조 원)를 책정하고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고 있지만, 대만에서는 18개월이면 오르던 공장이 현지에서는 약 4년이 걸렸고 방진복 전문 세탁소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장 한 채를 짓는 일이 곧 생태계 전체를 옮겨 심는 일임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저는 두 가지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첫째, 국가 경쟁력은 구호나 보조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은 출발점일 수 있으나, 수십 년간 쌓인 인재와 협력사 간 신뢰, 현장의 규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장은 껍데기에 그칩니다. 둘째, 그 신뢰의 자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직원이 같은 방진복을 입고 15년간 하나의 노즐만 연구했다는 일화, 은퇴하며 '내 ASML'이라 불렀다는 대목은 근면과 책임,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첨단 산업의 밑바닥을 이룬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기사도 한국을 미국 본토와 함께 일부 대체 생산지로 언급했듯,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공급망의 핵심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시니어가 한평생 공장과 사무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기술과 노하우를 후대에 물려주신 세대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숙련이 산업의 뿌리라는 기사의 통찰은, 우리 시니어의 경험이 결코 낡은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소중한 자산임을 새삼 알려 줍니다. 물론 이 기사가 던지는 경고도 가볍지 않습니다. 대만 해협의 긴장, 미중 수출 통제,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마주한 물리적 한계는 모두 불확실성의 요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래에서 시작된 이 정교한 문명이 국경을 넘는 신뢰와 협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사 말미에 스톤헨지를 끌어 온 고고학자의 설명처럼, 거대한 업적에 비밀은 없고 수많은 사람이 같은 밧줄을 함께 당겼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시니어 여러분께서 일평생 지켜 오신 성실과 신뢰의 가치가 이 시대 첨단 산업에서도 여전히 가장 단단한 토대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