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김형래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

  1. 20h ago

    [아침마다 지혜 #517] 오래된 사과 한 알이 들려주는 지혜

    가을 과일 가게에 들르면 크기와 색깔이 비슷한 사과가 가지런히 쌓여 있습니다. 흠집 없이 매끈하고 붉은 사과를 고르는 데 익숙해진 우리에게, 미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조금 낯설면서도 뜻깊습니다. 수백 년 전 품종인 전래종(heirloom) 사과가 다시 과수원과 시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숫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농무부(USDA)는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 지난 100년간 미국에서 재배된 사과 품종을 약 1만 4,000종으로 집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과협회(USApple)에 따르면 오늘날 갈라, 레드 딜리셔스, 허니크리스프, 그래니 스미스, 후지 다섯 품종이 전체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합니다. 한 세기 사이에 식탁에 오르는 사과의 얼굴이 몇 가지로 좁아진 셈입니다. 여기에 코스믹 크리스프나 핑크 레이디처럼 이름을 앞세운 상표 사과는 특허와 상표권, 라이선스 계약으로 묶여 있어서, 일반 농가가 마음대로 키우기 어려운 구조라고 합니다. 반대편에는 전래종이 있습니다. 전래종은 특허나 상표에 묶이지 않은 채 전해 내려온 품종입니다. 이를 되살린 사람들은 버지니아의 톰 버퍼드, 메인의 존 벙커, 최근 워싱턴주의 데이비드 벤스코터 같은 과수학자(pomologist)와 열정적인 애호가들입니다. 이들은 오래된 토지 소유 지도와 항공 사진, 버려진 농장, 옛 묘목 카탈로그, 지역 박람회 기록을 하나하나 뒤져 사라질 뻔한 품종을 찾아내고 이름을 확인해 왔습니다. 30년 넘게 이어진 이 끈기 있는 작업이 오늘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전래종이 지닌 힘은 번식 방식에서 나옵니다. 사과나무는 씨앗을 심으면 어미 나무와 같은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품종의 가지나 눈을 떼어 뿌리 부분인 대목(rootstock)에 붙이는 접붙이기(grafting)로 이어 갑니다. 코네티컷주 히든 젬 오차드의 제임스 워고 대표는 이 때문에 오늘 자라는 나무가 수백 년 전 원본 나무와 물리적으로 곧장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와의 연결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라는 뜻입니다. 히든 젬 오차드는 코네티컷 서부의 버려졌던 땅에 2017년 문을 열었고, 2023년에 첫 자가 수확 시즌을 맞았습니다. 약 7에이커(약 2만 8,000㎡) 규모에서 18세기 영국 품종 애슈미즈 커널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디저트의 재료로 알려진 립스턴 피핀 등을 팔고 있습니다. 개장 첫 주말 매출이 전년의 두 배로 늘었고, 다시 찾은 손님들이 이제 일반 매장 사과는 먹기 어렵다고 말한다니 소비자의 반응은 분명해 보입니다. 위스콘신주의 웨스턴 앤틱 애플스는 4대째 이어 온 가족 농장입니다. 증조부가 민간자연보호단(CCC)의 도움으로 첫 200그루를 심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은 오빠와 함께 농민 시장에서 9월에는 30종 안팎, 10월에는 최대 75종을 선보입니다. 시식을 권하고 단맛, 생식용 신맛, 제과제빵용 신맛으로 상자를 나누어 손님의 선택을 돕습니다. 손님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사과에 이렇게 다양한 맛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과제도 있습니다. 버몬트주 스콧 팜 오차드는 130종이 넘는 전래종을 키우는데, 과수원 관리자는 거친 녹색 껍질의 노브드 러싯 같은 품종이 낯선 사람 눈에는 병든 과일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맛은 훌륭해도 겉모습 때문에 외면받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농장은 해마다 10월에 시식과 강연이 어우러진 행사를 열어 인식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며 시니어 독자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것이 사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효율과 규격을 앞세운 시대에 소수 품종이 시장을 차지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품종이 줄어들면 병충해나 기후 변화 같은 위기에 대응할 선택지도 함께 줄어듭니다. 다양성을 지키는 일은 감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대비입니다. 이 대비를 한 사람들이 거창한 기관이 아니라 오래된 지도를 펴 들고 폐농장을 걷던 이들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오랜 세월 쌓인 경험과 지혜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하지만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검증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과수원 관리자의 말처럼, 수백 년 된 품종이 오늘까지 있는 것은 누군가 정성껏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니어 세대는 바로 그 돌봄의 손길을 이어 온 세대입니다. 새것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과 옛것이 함께 서 있을 때 우리 삶의 식탁이 더 풍성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올가을에는 매끈한 사과만이 아니라, 조금 투박해도 사연 깊은 과일에도 눈길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겉모습보다 깊은 맛, 빠른 효율보다 이어 온 정성이 우리에게 일러 주는 오래된 지혜를 한 입 베어 물며 되새겨 보시기를 권합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2. 1d ago

    [아침마다 지혜 #516] 모래로 쌓은 성, 신뢰로 지켜 온 문명

    미국의 시사 주간지 《더 뉴요커》는 2026년 10월 26일 호에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다룬 장문의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오늘날 인공지능(AI)과 세계 경제, 안보의 향방이 대만의 TSMC와 네덜란드의 ASML이라는 극소수 기업에 달려 있다고 짚었습니다. 시니어 독자께서도 스마트폰과 자동차, 병원의 심장박동기와 신용카드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반도체와 무관한 일상이 없는 만큼, 이 이야기를 함께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사가 먼저 상기시키는 것은 1980년대 미국의 태도입니다. 일본 기업의 부상 앞에서 당시 미국 안팎에서는 감자칩이든 컴퓨터칩이든 같은 칩이 아니냐는 식의 자유무역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 태도는 값비싼 대가로 돌아왔습니다. 전 세계 첨단 칩의 절대다수가 대만에서 생산되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봉쇄할 경우 세계 경제의 충격은 상상을 넘어설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전쟁 첫해에만 세계 경제가 10조 6,000억 달러(약 1경 4,600조 원), 곧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분의 1을 잃을 수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시가총액이 약 2조 달러(약 2,760조 원)에 이르는 TSMC가 대만의 이른바 '실리콘 방패'로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칩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핵심은 빛입니다. 칩의 설계도를 마스크에 새기고 빛을 투사해 실리콘 웨이퍼 위에 회로를 찍어 내는 노광(리소그래피, lithography) 공정이 반도체 제조의 중심에 있습니다. 파장이 짧을수록 더 가는 선을 새길 수 있기에 업계는 오랜 세월 더 짧은 빛을 좇았고, 마침내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기술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술을 상용 장비로 완성한 곳이 ASML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용융된 주석 방울을 초당 6만 번 레이저로 쏘아 태양 표면보다 훨씬 뜨거운 플라스마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빛을 독일 자이스(Zeiss)의 극도로 매끄러운 거울로 모읍니다. 장비 한 대의 가격은 최대 4억 달러(약 5,500억 원)에 달하고, 구성 부품은 수백만 개에 이릅니다. 개발이 한창일 때는 고객사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출력에 머물러 납기를 7년이나 넘겼다고 하니, 이 기술이 얼마나 오래 인내한 끝에 얻어진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TSMC의 성취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1931년 중국에서 태어난 설립자 모리스 창은 1980년대 대만 정부의 요청으로 반도체 사업을 맡았고, 설계는 하지 않고 위탁 생산만 전담하는 파운드리(foundry)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자체 공장을 갖지 않는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대한 공장 건설비를 감당할 수 없던 설계 전문 기업들이 이 모델의 고객이 되었고, 엔비디아와 애플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됩니다. 기사는 TSMC의 경쟁력이 생산량이 늘수록 공정이 개선되는 학습 곡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수율(yield)을 끌어올리려는 집요한 관리 문화에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불과 몇 분의 장비 유휴 시간까지 아침 회의에서 점검하는 조직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산업이 개별 천재의 업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사는 ASML 설계도에 '파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지식이 전체 시스템에 흩어져 있으며, 문서로 남지 않은 숙련 기술자들의 손끝 감각이 공정을 지탱한다고 전합니다. 한 칩이 완성되기까지 국경을 70번 넘나들 수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고순도 폴리실리콘, 특수 석영, 웨이퍼,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가 각기 소수 기업과 소수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약 500억 달러(약 69조 원)를 책정하고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고 있지만, 대만에서는 18개월이면 오르던 공장이 현지에서는 약 4년이 걸렸고 방진복 전문 세탁소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장 한 채를 짓는 일이 곧 생태계 전체를 옮겨 심는 일임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저는 두 가지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첫째, 국가 경쟁력은 구호나 보조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은 출발점일 수 있으나, 수십 년간 쌓인 인재와 협력사 간 신뢰, 현장의 규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장은 껍데기에 그칩니다. 둘째, 그 신뢰의 자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직원이 같은 방진복을 입고 15년간 하나의 노즐만 연구했다는 일화, 은퇴하며 '내 ASML'이라 불렀다는 대목은 근면과 책임,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첨단 산업의 밑바닥을 이룬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기사도 한국을 미국 본토와 함께 일부 대체 생산지로 언급했듯,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공급망의 핵심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시니어가 한평생 공장과 사무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기술과 노하우를 후대에 물려주신 세대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숙련이 산업의 뿌리라는 기사의 통찰은, 우리 시니어의 경험이 결코 낡은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소중한 자산임을 새삼 알려 줍니다. 물론 이 기사가 던지는 경고도 가볍지 않습니다. 대만 해협의 긴장, 미중 수출 통제,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마주한 물리적 한계는 모두 불확실성의 요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래에서 시작된 이 정교한 문명이 국경을 넘는 신뢰와 협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사 말미에 스톤헨지를 끌어 온 고고학자의 설명처럼, 거대한 업적에 비밀은 없고 수많은 사람이 같은 밧줄을 함께 당겼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시니어 여러분께서 일평생 지켜 오신 성실과 신뢰의 가치가 이 시대 첨단 산업에서도 여전히 가장 단단한 토대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3. 2d ago

    [아침마다 지혜 #515] 테슬라는 이겼으나 스웨덴 모델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노사 자율과 기술 친화, 시니어 세대가 눈여겨볼 북유럽의 해법 세상의 이목을 끌던 사건도 결말은 쉽게 잊히곤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살피는 일은 시작을 아는 것만큼 값진 공부입니다. 3년 가까이 이어진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와 스웨덴 노동조합 운동의 대결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사건은 20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웨덴의 테슬라 정비 노동자들은 회사가 금속 산업 노동자 중심의 산별노조인 IF 메탈(IF Metall)과의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자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노조들도 동조 파업에 나서 우편 배달과 쓰레기 수거, 항만에서의 차량 하역까지 멈춰 섰습니다. 머스크 최고경영자는 이를 두고 '미친 짓'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양측이 물러설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테슬라는 전 세계 어느 사업장에서도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지키려 했습니다. 스웨덴 노조는 정부가 법으로 정하기보다 노사가 스스로 협상해 규칙을 만드는 자국의 노동시장 모델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는 노조의 패배였습니다. 올여름 IF 메탈은 파업 1,000일을 넘긴 시점에 파업 철회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테슬라가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 전원에게 보상을 제시해 회사를 떠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매수(buy out)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의 단체협상 사무국장은 파업할 노동자가 없으면 파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조직률이 높고 재정이 탄탄하며 제도적 뒷받침까지 갖춘 스웨덴 노조조차 테슬라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지 못했으니, 여건이 훨씬 열악한 다른 나라 노조에는 결코 고무적인 소식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2022년 스태튼아일랜드의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4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아마존은 계약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웨덴 모델은 이 사건으로 무너졌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테슬라 사태가 다른 기업으로 번지는 연쇄 붕괴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현지의 노조 관계자들은 다른 기업과의 단체협약이 계속 체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대표적으로 '캔디 크러시'를 만든 비디오 게임 기업 킹(King)은 파업 위협이 따른 1년간의 협상 끝에 지난달 스웨덴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었습니다. 이번 분쟁을 다룬 책을 쓴 싱크탱크 아레나 이데(Arena Idé)의 게르만 벤더 연구원은 파업은 끝났고 노조는 졌지만 스웨덴 모델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스웨덴 노조가 기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미국 럿거스 대학교의 수전 슈어먼 노동학 교수는 북유럽 노조가 수출 주도형 경제에서 기업의 경쟁력 유지가 필수임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기술 도입을 막는 데 힘을 쏟기보다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성과를 조합원에게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지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웨덴은 수많은 스타트업 덕분에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불려 왔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도 덴마크·핀란드·스웨덴의 기업 인공지능 도입률은 비교 대상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현지의 한 노조 활동가는 두려운 것은 신기술이 아니라 낡은 기술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 사례에서 우리 사회가 배울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노사 관계의 근간은 대립이 아니라 신뢰와 자율에 있어야 합니다. 정부의 법과 규제로 모든 것을 정하려 하기보다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고 합의하는 전통이 오랜 세월 사회의 안정을 지켜 왔습니다. 둘째, 기업의 경쟁력이 곧 일자리의 기반이라는 상식을 노사가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일터를 지켜 온 시니어 세대는 기업이 흔들릴 때 일자리와 노후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셋째, 기술을 막아서기보다 익히고 활용하는 편이 노동자 자신에게 이롭습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퍼지는 오늘날, 시니어 역시 배움을 놓지 않을 때 일터와 사회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번 결말이 노조에 가볍지 않은 숙제를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보상을 앞세운 회사의 선택 앞에서 조직의 단결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회사로서도 협약을 끝내 거부한 채 쌓은 갈등의 비용과 평판을 가볍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긴 쪽도 진 쪽도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스웨덴의 경험이 알려 주는 교훈은 단순합니다. 한 번의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오래 버티는 힘이며, 그 힘은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쟁력과 공정한 분배를 함께 고민하는 노사의 성숙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도 대립의 언어를 넘어 협력의 문법을 다듬어 가기를 바랍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수정삭제 주소복사▲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 3d ago

    [아침마다 지혜 #514] 밤낮없는 헌신을 요구한 채용 공고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채용 공고가 세계 기술 업계의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2026년 10월 19일 자 지면으로 보도한 이 공고는 오픈AI, 스트라이프, 도어대시 등의 초기 투자자로 알려진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 회사 코슬라 벤처스의 설립자 비노드 코슬라 씨의 비서실장(chief of staff) 모집입니다. 공고가 요구한 조건은 명료합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사무실에 출근해 대면으로 일해야 하고, 필요할 때는 야간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연락이 닿아야 합니다. 이 일정을 3년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습니다. 인재 영입을 맡은 부사장은 링크드인 게시물에서 예측 가능한 근무 시간이나 정리된 지침서, 잦은 업무 지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자리라고 밝혔습니다. 반응은 크게 갈렸습니다. 수면 기술 기업 에이트 슬립의 마테오 프란체스케티 씨는 사업이 바쁘지 않았다면 직접 지원했을 것이라고 했고, 레딧 공동 설립자 알렉시스 오하니언 씨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자리라고 평가했습니다. 반면 이 공고를 일종의 계약 노예에 빗댄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 급여 범위가 공고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을 키웠습니다. 회사 측은 1,000건 이상의 지원서가 몰릴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코슬라 씨는 금요일 늦게 자신의 X 게시물로 입장을 보충했습니다. 특정한 근무 시간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강도 높은 자리이며, 자신이 주 80시간을 일하는 만큼 그 속도를 따라올 사람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번 공고가 눈길을 끄는 더 큰 이유는 업계 전반의 흐름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대학교의 역사학자 마거릿 오마라 교수는 이를 마음속에만 두던 말을 이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젊은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창업자들 사이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을 일하는 이른바 9-9-6 근무제가 퍼지고 있습니다. 보험 스타트업 코기는 지원자의 체력을 가늠하겠다며 주말을 포함한 며칠간의 업무 심사를 요구했습니다. 레몬라임이라는 스타트업은 올해 초 네트워킹 행사에서 회사 로고 문신을 새길 사람에게 면접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과로가 감추어야 할 부담이 아니라 드러내어 자랑하는 덕목이 되었다는 진단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를 노동시장의 힘의 균형으로 읽는 시각도 있습니다. 컨설팅 기업 그룹 360 컨설팅의 라힐라 안와르 대표는 채용 한파가 이어지는 지금이어서 이런 요구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지원자의 선택지가 넓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자리의 매력이 일자리 자체보다 그 이후에 열리는 출구(exit)에 있다고 짚었습니다. 비서실장직은 오래전부터 최고위직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져 왔고, 투자 검토와 포트폴리오 기업 협력, 인적 네트워크 구축을 곁에서 돕는 생각의 동반자(thought partner) 역할을 맡기 때문입니다. 코슬라 씨는 모든 분야를 알 필요는 없고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근본 원리(first principles)에서 사고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보통 기술 업계의 혹사 문화에 비판적인 제이슨 프라이드 37시그널스 공동 설립자도 이번 공고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대치가 매우 명확하다는 이유였고, 자신이 25세였다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던 헤삼 모틀라그 스탠퍼드 대학교 겸임교수 역시 더없이 값진 배움의 경험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실관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이 소식을 우리 시니어 독자께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이번 공고에는 평가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조건을 숨기지 않고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고, 지원자는 그것을 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약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인 뒤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는 일보다는 정직한 방식입니다. 한 분야의 정점에 선 사람 곁에서 일하며 배우겠다는 젊은이의 도전 의지도 폄하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세대 역시 젊은 시절 밤을 새워 일하며 오늘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선택이 자유로운 것과 그 선택이 건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자리가 귀한 시기에는 지원자가 거절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선택이 온전히 자유롭다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주 80시간의 노동을 3년간 이어가는 일은 건강, 가정, 인간관계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헌신이 미덕이 되려면 정당한 보상과 회복할 시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공고가 급여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은 그래서 아쉽습니다. 시니어 세대가 이 사안에서 얻을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의 가치가 시간의 길이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친 분들께서는 성과와 신뢰가 쌓이는 방식이 무엇인지 이미 체득하고 계십니다. 다른 하나는 다음 세대를 대하는 어른의 책임입니다. 젊은이들이 치열하게 달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열정이 소모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균형추 역할은 경험 있는 세대가 맡아야 합니다. 후배에게는 열심히 일하라는 말과 함께 오래 일하는 법도 일러 주어야 합니다. 실리콘밸리의 이 공고가 앞으로 일하는 방식의 기준이 될지, 한때의 과열된 풍경으로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에나 일의 목적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치열함이 의미를 얻으려면 그 끝에 건강한 삶이 놓여 있어야 합니다. 시니어 여러분께서 쌓아 오신 지혜가 이 대목에서 젊은 세대에게 가장 값진 조언이 되리라 믿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5. 4d ago

    [아침마다 지혜 #513] 무릎은 닳는 소모품이 아니라 걸을수록 단단해지는 생명의 펌프입니다

    무릎이 아프면 걷는 일부터 줄이는 시니어가 많습니다. 관절 연골은 쓸수록 닳는 부품이니 아껴 써야 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10월 19일 자 건강 칼럼에서 이 통념을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웰빙 칼럼니스트 그레첸 레이놀즈가 정형외과 전문가들의 견해와 최근 연구를 정리한 이 글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무릎은 기계 부품과 달리 적절한 자극을 받을 때 스스로를 돌보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의학적 원리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관절 연골에는 혈관이 직접 닿지 않습니다. 영양분은 관절 안을 채운 활액(synovial fluid)을 통해 공급되는데, 활액이 순환하려면 체중이 실렸다가 풀리는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걸을 때마다 연골이 스펀지처럼 눌렸다 펴지면서 영양분이 스며드는 셈입니다. 연골 세포도 이 압력을 감지해 재생에 필요한 신호 물질을 내보냅니다. 반대로 통증이 두려워 오래 앉아 있거나 누워 지내면 활액의 흐름이 둔해지고 연골은 오히려 메말라 약해집니다. 아낀다고 한 일이 도리어 퇴행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이 글은 관절염을 무릎 한 부위의 국소 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활액은 몸 전체의 대사 상태(metabolic health)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비만, 고혈당, 만성 스트레스, 전신 염증이 심해지면 염증성 사이토카인(inflammatory cytokine)이 활액으로 스며듭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관절 안쪽 세포들이 연골을 키우는 물질 대신 연골을 분해하는 효소를 내놓게 됩니다. 무릎의 통증이 사실은 온몸의 생활 습관이 쌓아 온 결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걷기가 체중과 혈당을 다스리고 몸 전체의 염증 수준을 낮춘다는 점에서, 보행은 무릎뿐 아니라 몸 전체를 돌보는 일이 됩니다. 걷기의 효과는 무릎에서 그치지 않고 머리로도 이어집니다. 걷기는 심박수를 완만하게 높여 전두엽과 해마로 가는 산소와 영양분을 늘립니다. 이는 뇌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가는 능력, 곧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을 북돋는 바탕이 됩니다. 칼럼은 스탠퍼드대학교 연구팀의 실험도 소개합니다. 이 실험에서는 앉아 있을 때보다 걸을 때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 곧 하나의 문제에서 여러 해법을 떠올리는 능력이 평균 60퍼센트 이상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창의적 발상을 측정한 실험 결과이며, 치매 예방 효과를 직접 증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걸으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옛 선비들의 경험이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는 점은 의미가 큽니다. 달리기에 대한 오해도 바로잡았습니다. 취미 수준으로 꾸준히 조깅을 하는 사람은 무릎이 망가진다고들 걱정하지만, 장기 추적 연구에서는 오히려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관절염 발생률이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만 이미 통증이 있거나 관절 질환 진단을 받은 시니어에게 달리기를 권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분들께는 평지 걷기가 알맞습니다. 통증이 심해지지 않는 범위에서 꾸준히 걸으면 연골의 회복력이 살아나고, 수술 시기를 늦추거나 피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합니다. 실천 방법은 소박합니다. 마라톤이나 고강도 운동이 아니라 하루 10분 걷기에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가장 바쁘고 힘든 날에도 지킬 수 있는 분량이어야 오래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거리는 몸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씩 늘리면 됩니다. 이 칼럼을 읽으며 저는 우리 부모 세대의 생활 철학을 떠올렸습니다. 특별한 운동 기구도 없던 시절, 그분들은 새벽에 일어나 걷고 움직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함이 곧 건강이었고, 몸은 쓰는 만큼 지켜진다는 이치를 삶으로 아셨던 것입니다. 편리함에 길든 오늘날 우리는 아프다는 이유로 움직임을 줄이고 의자와 소파에 몸을 맡기는 일이 잦습니다. 건강한 노후는 누가 대신 만들어 주지 않으며, 스스로 한 걸음 내딛는 책임에서 출발합니다. 그 책임을 가족과 함께 실천한다면 더욱 든든할 것입니다. 부부가 나란히 동네 길을 걷고, 자녀나 손주와 함께 주말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우리가 지켜 가야 할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시니어에게 같은 처방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걷는 도중 통증이 점점 심해지거나 관절이 붓고 열감이 있다면 무리하지 말고 정형외과 전문의의 진단을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이 글의 요지는 통증이 있어도 무조건 참고 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통증이 두려워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을 아침 공기가 한결 맑아졌습니다. 오늘 하루 10분이라도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집 앞을 나서 보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릎의 연골을 키우고 머리를 맑게 하며, 수명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투자가 될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6. 5d ago

    [아침마다 지혜 #512] 닻을 내릴 곳을 잃은 바다 위 시니어들, 질서와 온정 사이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북쪽, 마린 카운티의 리처드슨 베이(Richardson Bay)에서 70여 년간 이어져 온 수상 공동체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당국은 이번 주 이 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불법 정박 선박들을 모두 철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스스로를 앵커 아웃(anchor out), 곧 닻을 내리고 바다 위에서 사는 사람이라 부르던 이들의 삶터가 문을 닫는 순간입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지난 16일 자 세계면에 보도한 내용입니다. 이 공동체의 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0년대 후반 조선소가 문을 닫자 참전 용사와 예술가들이 버려진 선박과 바지선으로 모여들었고, 1970년대에는 수백 명이 폐자재로 지은 하우스보트에 살며 자체 신문까지 발행하는 수상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해안 정비를 둘러싼 당국과의 충돌은 '하우스보트 전쟁'이라 불릴 만큼 격렬했고, 대다수 하우스보트는 법적 규제 아래 육상 마리나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개활 수역에 남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선단은 불어났고, 2018년 공식 집계로는 선박이 250척에 가까웠습니다. 이 공동체가 철거 대상이 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당국은 상당수 선박이 안전하지 않거나 버려진 상태이며, 닻과 닻줄 사슬이 탄소를 저장하는 중요한 해양 서식지인 거머리말(eelgrass) 군락을 훼손한다고 밝혔습니다. 오물 무단 투기에 대한 민원이 이어졌고, 폭풍우에 배가 풀려 육지로 떠밀리거나 불이 나고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인근 수상 식당 지배인은 서부 개척시대 같았다며, 배가 식당을 덮칠 뻔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약 10년 전부터 지자체가 대대적인 철거에 나선 배경입니다. 당국은 단속만 한 것은 아닙니다. 2022년부터 배를 자진 인도하는 이들에게 선박 길이 1피트당 150달러(약 21만 원)를 보상금으로 지급했고, 이듬해에는 300만 달러(약 42억 원) 규모의 주정부 보조금으로 임시 주거 바우처를 제공했습니다. 리처드슨 베이 지역청은 이번 달까지 500척 넘는 선박을 인양해 철거했으며, 52명의 전직 앵커 아웃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1년간 일반 아파트에 살게 한 뒤 연방 공공임대로 잇는다는 구상은 임대료 급등으로 주택 당국의 재원이 바닥나면서 2025년 5월 무너졌습니다. 지역청장은 영구 주거 바우처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는 냉정했습니다. 20년간 정박지에서 살아온 56세 여성은 바우처를 받지 못해 남편,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마리나에 세워 둔 픽업트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45세 채드 위클리프 씨는 퇴거 명령 이후에도 자신과 반려견을 받아 줄 거처를 찾지 못했다며, 더 거친 먼바다로 배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오래 살아 다른 방식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올해 75세인 리처드 애슈록 씨는 정규 마리나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길을 얻었지만, 65세 피터 글레이저 씨는 욕조와 세탁기를 갖게 된 것을 믿기 어려워하면서도 70년 공동체가 사라지는 데 깊은 우울감을 토로했습니다. 이 사안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나 패배로 보기 어렵습니다. 공공 수역은 모두의 자산이므로 안전과 환경, 법질서를 지키려는 당국의 책무는 정당합니다. 불법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선박을 방치한 행위까지 낭만으로 포장할 수는 없습니다. 애슈록 씨조차 경험도 없이 절박함만으로 들어온 이들이 배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소살리토의 용도지역제(zoning) 개정을 둘러싼 논쟁도 있습니다. 찬성 측은 낡은 규제가 해양 산업의 적응을 막는다고 하고, 반대 측은 개발이 수리소와 해양 일자리를 밀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이어질까 우려합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물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고령의 시니어이고, 비싼 주거비에 밀려 마지막으로 닻을 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원칙을 세우는 일과 사람을 살피는 일은 서로 부딪히지 않아야 합니다. 질서를 회복하려면 철거에 앞서 갈 곳을 마련하는 책임 있는 설계가 뒤따라야 합니다. 예산이 바닥난 뒤에야 끊긴 주거 연계 사업은 정책이 현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도 시니어 1인 가구와 주거 취약 문제에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되 그 질서 밖으로 밀려나는 이웃을 마지막까지 품는 것, 그것이 성숙한 사회의 품격일 것입니다. 바다 위 마을은 사라지고 있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우리 곁에 아직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7. 6d ago

    [아침마다 지혜 #511]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며

    미국의 작가 레베카 배리 씨가 뉴스레터에 기고한 수기가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2기 진단을 받은 아버지와 함께 회고록 원고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경험담입니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뒤 아버지는 가사도우미와 딸의 도움을 받으며 홀로 생활하였고, 운전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쇼핑몰 근처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지인에게 목격되었고, 딸은 이를 계기로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을 대폭 늘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 증상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집필하던 『멕시코에서 증기를 쫓아서(Chasing Steam in Mexico)』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증기기관차를 촬영한 기억을 엮은 책입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미국 친우봉사단(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을 통해 멕시코 틀락스칼라(Tlaxcala)에서 도로를 닦고 우물을 파는 봉사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여가 때마다 철도 노선을 찾아 히치하이킹과 야영을 하며 기관차와 철도 노동자들의 모습을 흑백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부녀는 일주일에 여러 차례 장작 난로 앞에서 마주 앉아, 좋아하는 멕시코 민속 음악을 틀어 놓고 원고를 소리 내어 함께 읽으며 수정하고 사진을 골랐습니다. 기분이 가라앉은 채 딸을 맞이하던 아버지도 작업이 몇 시간 이어지면 활력을 되찾았고, 기관차의 차륜 배열을 설명하거나 1965년 유카탄에서 있었던 저녁 모임의 일화를 또렷하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시니어의 치매 유병률은 대략 10퍼센트 안팎으로 추정되며, 환자 수는 100만 명에 가깝습니다. 의학계는 약물 치료와 함께 비약물적 중재를 권고하는데, 지난 삶을 되짚는 회상요법(reminiscence therapy)과 음악·미술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불안을 낮추고 정서와 자존감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여러 편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활동은 병의 진행을 멈추는 치료가 아니며, 효과에도 개인차가 있습니다. 이 글 역시 한 가족의 경험을 기록한 수기이므로 일반화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변화는 딸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저자는 책 작업이 마치 시간 캡슐 속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뉴스도 소셜 미디어도 없이 두 사람과 하나의 프로젝트만 있는 시간 속에서, 아버지의 건강 악화에만 쏠려 있던 시선이 함께 만드는 일로 옮겨 갔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 작업은 감시하거나 주변을 맴돌지 않으면서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아버지에게는 돌봄을 받는 중에도 스스로 이끈다는 감각을 지켜 주었습니다. 딸은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모험담과 처음 보는 사진을 접하며, 자신이 태어나기 전 한 사람의 예술가로 살았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시련도 있었습니다. 작업 1년쯤 뒤 아버지는 손목 통증을 호소하였고 진단은 패혈증(sepsis)이었습니다. 3주간 입원했고 이후 운전을 완전히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함께 몰두할 일이 없었다면 모든 관심이 질병과 병원, 빨라지는 기억력 상실에만 갇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던 부부는 완성된 책을 직접 출간하였고, 아버지는 요즘도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많은 것을 잊어도 책이 아름다웠던 장소로 데려다준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정이 지닌 본래의 힘을 새삼 확인합니다. 우리나라는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도입하고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내세워 공적 돌봄 체계를 갖추어 왔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마땅히 확충되어야 하지만, 제도가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돌봄의 기술이지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가장 깊이 알고 기억해 줄 수 있는 이는 결국 가족입니다. 부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기록하는 일은 효(孝)의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실천이라 하겠습니다. 저자의 조언은 소박합니다. 오래된 편지와 일기 읽기, 사진첩 정리, 함께 음악 듣기, 집안 요리법 재현하기 등 무엇이든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별이 머지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기에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관계가 잃어가는 것들로만 채워지는 데 지쳤다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시선을 돌려 보라는 뜻입니다. 글의 끝에서 딸은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며 오직 한 마디만 떠올린다고 고백합니다. 그 마음은 부모를 모시는 모든 시니어 가족이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저녁, 부모님 곁에 앉아 낡은 사진첩을 함께 펼쳐 보시기를 권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8. Oct 16

    [아침마다 지혜 #510] AI 인재는 '진심'과 '유연함'에 응답합니다

    일류 인공지능(AI) 인재를 확보하려는 스타트업의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업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이들 전문가가 어떤 요소를 보고 응답하는지는 그동안 막연한 짐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26년 11~12월호는 이 물음에 데이터로 답한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스타트업 전용 인재 매칭 플랫폼 코피스페이스(CoffeeSpace)의 연구진이 플랫폼에서 오간 100만 건 이상의 상호작용 기록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연구진은 창업가의 어떤 속성이 네트워킹 초대의 수락과 대화 시작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폈습니다. 법학 학위나 주요 빅테크 근무 경력 같은 이력이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이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창업가를 AI 전문 배경이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으로 나누어 속성별 영향을 비교했습니다. 핵심 결론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에 전업(full-time)으로 몰입하고 있으며 이미 일정한 진척을 이루었다는 신호를 보낸 창업가일수록 수락률이 크게 높았습니다. 전업으로 일한다는 속성이 수락률에 미친 영향은 AI 배경이 없는 창업가에게서 6.1퍼센트, AI 배경이 있는 창업가에게서 18.0퍼센트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속성이라도 창업가 자신이 AI 전문성을 갖춘 경우 효과가 세 배가량 컸다는 뜻입니다. AI 전문성이 있는 창업가에게 가장 큰 플러스 요인은 공동창업자와의 지분 분배(equity split)에 유연한 태도였습니다. 이 속성은 AI 배경이 있는 창업가에게서 20.5퍼센트, 없는 창업가에게서 9.2퍼센트의 영향을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공동창업자와도 일할 수 있다는 개방성이 18.2퍼센트로 컸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AI 배경이 없는 창업가에게는 이 항목이 오히려 마이너스 0.8퍼센트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신뢰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력 요인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메타,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MAANG) 근무 경험은 AI 배경이 있는 창업가에게 12.7퍼센트, 없는 창업가에게 4.6퍼센트의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학 학위 보유나 재학은 각각 10.7퍼센트와 4.0퍼센트였고, 영업 직무 경험은 8.6퍼센트와 5.5퍼센트였습니다. 박사 학위는 7.8퍼센트와 5.8퍼센트, 경영학석사(MBA)는 5.6퍼센트와 4.4퍼센트로, 학위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반면 관심사가 넓다고 밝히는 것은 AI 배경이 없는 창업가에게 마이너스 11.4퍼센트라는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을 낳았습니다. AI 배경이 있는 창업가에게도 플러스 3.3퍼센트에 그쳤습니다. 이미 다른 공동창업자들과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각각 마이너스 0.6퍼센트와 플러스 0.8퍼센트로 사실상 영향이 없었습니다. 아이디어는 있으나 함께 만들 사람을 찾고 있다는 표현 역시 0.7퍼센트와 5.1퍼센트에 머물렀습니다. 화려한 가능성의 나열보다 하나의 방향에 대한 확신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연구에는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플랫폼에서 나온 데이터이므로 모든 창업 환경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수락률은 대화의 시작을 보여 줄 뿐, 실제 합류나 사업 성공을 보장하는 지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결과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습니다. 인재는 이력서의 화려함보다 창업가가 자기 일에 얼마나 헌신하는지, 그리고 이익을 나눌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를 먼저 본다는 것입니다. 이는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얻는 일은 말솜씨가 아니라 몸소 보이는 성실과 신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이번 데이터가 다시 확인해 줍니다. 시니어 독자께도 시사점이 있습니다. 평생 조직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이나 사회적 사업을 준비하는 시니어가 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재와 손잡으려 할 때 필요한 것은 젊은 기술자에게 맞추려는 흉내가 아닙니다. 맡은 일에 온전히 몰두하는 자세, 이미 이룬 작은 성과의 정직한 공개, 그리고 몫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니어가 가장 오래 갈고닦아 온 덕목이기도 합니다. 결국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힘은 첨단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와 일에 대한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신뢰를 쌓는 일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이번 연구는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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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