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인(人) 말씀묵상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1. 7h ago

    사사기 4장 1-10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 20년 동안 고통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1-3절,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쯤 되면 반복되는 패턴으로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반복은 솔직히 현재 우리의 삶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흥미로운 것은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4-5절,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그녀는 바락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바락은 드보라가 동행하기를 원했고, 결국 드보라가 함께 전장에 갑니다 (6-10절). 묵상 포인트 1. 에훗 이후 80년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악행과 함께 무너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백성의 질서를 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순종 안에서만 유지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자 하나님은 150년 전 무너뜨렸던 하솔을 다시 일으켜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심판이 점점 길어집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반역이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나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샬롬에 더욱 깊이 거할 수 있을까요? 2. 대로가 끊기고 백성이 숨어 살던 시대에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말씀과 정의로 언약백성을 다시 세웁니다. 어쩌면 그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 능한 장군을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드보라가 여자라는 것에 때로는 우리가 너무 관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드보라의 존재 가치는 젠더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시대에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힘이 아니라 깨어 있기를 간구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요? 3.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바락에게 전달됩니다. 바락의 문제는 말씀의 부재가 아닙니다. 철 병거가 하나님이 약속보다 더 크게 보인 것이 문제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보았지만 바락은 시스라의 전력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보라가 함께 가야만 움직이겠다고 합니다. 바락의 문제는 불순종과 순종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바락의 경우 전쟁에는 승리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은 누리지 못합니다. 믿음은 위험이 없을 때의 순종이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당장 눈앞의 위험보다 크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길을 걷고 있나요? Support the show

  2. 1d ago

    사사기 3장 11-31절

    댓글 창 오늘 본문에서는 옷니엘 사사의 40년 통치 후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일으켜 십팔 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12-14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언약백성이 다시 부르짖자 이번에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구원자로 세우십니다. 왼손잡이를 직역하면 '오른손이 묶인 자'라는 표현인데요,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왼손 사용에 특화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사기 20장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베냐민 용사 700명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장애보다는 특화된 전투 능력을 뜻할 것 같습니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다는 명분으로 모압에 가서 에글론을 죽입니다. 웬만한 영화를 뺨치듯 생생한 장면이 15-23절에 생생히 기록되었습니다. 21-22절,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표현이 장난이 아니죠. 사사 에훗이 이끄는 이스라엘은 모압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합니다. 29-30절, "그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그 그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묵상 포인트 1. 성경은 이스라엘의 문제의 원인을 모압이 아닌 이스라엘에서 찾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은 모압 왕 에글론이 강해서 이스라엘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의 "모압"은 우리 믿음이 흔들리는 만큼 강대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2. 에글론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해서 방심합니다. 그의 성공은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게 하였습니다. 인간은 약해서 망하는 경우보다 스스로 강하다고 착각해서 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옳은 것을 모르는 것보다 틀린 것을 옳다고 굳게 믿는 경우가 더 심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굳게 의지하는 신념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요? 3. 사사기는 에글론을 반복해서 "비둔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육체에 대한 비하적 표현이 아닙니다. 거대한 몸집과 탐욕의 왕의 최후를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주변에 적대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그들에게 압제 압제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 없는 삶을 정상으로 여긴 영적 비둔함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목말라하며 그리워하는 영적 감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Support the show

  3. 3d ago

    사사기 2장 1-10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자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1-3절,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것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은 울면서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4-5절,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그들은 여호수아와 정복 1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며, 그 결과 하나님도 하나님의 함께하심도 잊어버린 세대가 되었습니다.  7-10절,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묵상 포인트 이스라엘은 계속 패배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원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철 병거와 전력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의 원인이 불순종과 타협에 있다고 밝히십니다. 확실히 제거해야 할 가나안의 가치관과 철학 그리고 그들의 물질 문명을 남겨두면서 우상을 용인하며 자신들의 편의와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게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심판의 말씀을 듣고는 이스라엘은 크게 울고 제사를 드렸지만 문제는 그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사람들만 더 많이 모이면 될 것이라 믿습니까? 사람들이 희생만 조금 더 하면 될 것이라 아니면 목사가 설교를 좀 더 잘하면, 찬양팀이 생기면, 교회가 더 젊어지면, 예배 장소만 확보되면 등등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모세의 탁월한 리더십이나 여호수아의 전략이나 이스라엘의 전투력이 아니었음을 기억합니다. 요즘 시대의 문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투자를 할 뿐 하나님에게 순종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금과 봉사와 전도로 투자를 해서 자신들의 꿈을 이루고자 할 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너무 과한, 현실감이 떨어지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종교 생활의 즐거움이 솔직히 건전한 취미 활동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배경 사사기에 ‘여호와의 사자’는 19회, ‘하나님의 사자’는 3회 나타날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지도자의 부재로 힘들어했던 사사 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다스리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질책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목소리를 높여 웁니다. 사사기에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이 모두 네 번(2:4; 10:8; 20:1, 26), ‘모든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두 번(8:27; 20:34) 나타납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열일곱 번 사용된 여호수아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게 등장하죠.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함께 정복 전쟁을 벌였던 여호수아 시대에 비해 사사 시대는 지파별 분열이 심했음을 알려 줍니다. Support the show

  4. 5d ago

    사사기 1장 22-36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탐꾼을 보내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2절-26절,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선대하는 것이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니 좋게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던 가나안의 일부분을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수용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습니다. 끝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합니다. 28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묵상 포인트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늘 문을 보았고 제단을 쌓았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벧엘은 거룩한 기억만 남았을 뿐 실제로는 가나안 문명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벧엘이 아니라 루스입니다. 거룩한 과거는 거룩한 현재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도 방치되어 표류하면 결국은 자연스럽게 세속화됩니다. 어제의 순종은 감사의 기억이 될 수는 있지만 오늘의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의 선택과 결과는 같았습니다. 모두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고 멈춥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편의와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가나안이라는 세상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안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이유였습니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가나안을 내쫓지 않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철병거가 두려웠지만 나중에는 가나안의 노동력이 아까웠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순종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정적 번영에 눈이 멀면 이 세상을 품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타협입니다. 고민하고 고심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타협을 어떻게 하면 알아차리고 밀어낼 수 있을까요? 쫓아내지 않았던 타협이 단 지파에 이르면 오히려 쫓겨나는 무력함이 되고 맙니다 (34절). 세상과의 타협은 처음에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땅을 잃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고 비전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할 믿음의 비전을 잃어버리니 영적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순종을 잃으니 공간을 잃고, 사명을 잃으니 영향력을 잃고, 거룩을 잃으니 영적 주도권도 잃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잃고 성도가 자신의 개인의 축복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만 찾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영적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가 무기력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배경이해 이 단락은 북쪽에 속한 므낫세 반 지파와 나머지 다섯 지파의 정복 전쟁에 대해 다룹니다. 요단강 동쪽은 모세 시대에 정복이 마무리되었으므로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등장하는 지파의 순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북으로 갈수록 처참한 실패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 가문을 언급할 때(22절)를 제외하고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가나안 사람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등 불순종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Support the show

  5. 6d ago

    사사기 1장 11-21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지도자가 통치하는 사회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와 공동체는 많은 영역에서 안정됨을 누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악사의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기럇 세벨을 점령한 옷니엘이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합니다. 11-13절,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악사라는 여인은 사사기에서 이름 없이 언급되는 많은 여성과 달리 그녀는 결혼식에서도 주도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가정을 위해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샘을 요구하고 윗샘과 아랫샘을 받아 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샘물은 귀한 자산이었습니다. 14-15절,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그리고 본문은 가나안 정복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겐 족속이 유다와 함께 유다 광야로 가서 그 백성과 함께 거주하며, 시므온은 유다와 함께 스밧을 진멸하지만 그 외에는 골짜기 주민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베냐민 자손도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기록됩니다. 묵상 포인트 아도니 베섹은 힘의 질서로 살았습니다. 정복하고 통제하고 굴복시키며 자기 세계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힘으로 세운 세계는 결국 힘으로 무너지는 것을 배웁니다. 아도니 베섹의 끝은 결국 손과 발의 상실과 심판이었습니다. 반면 옷니엘과 악사는 힘을 과시하지 않고 말씀 앞에 순종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억지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겸손히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믿음은 선하신 아버지께 받을 줄 아는 담대함입니다. 힘의 끝은 상실과 멸망이라면 믿음의 끝은 샘물과 생명입니다.  철 병거 앞에 멈춘 유다와 가나안을 살려 둔 베냐민은 사사기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전면적인 배교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멈춤, 작은 유보, 작은 합리화였습니다. 즉, 순종의 절대성이 현실이라는 조건 앞에서 조금씩 밀려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철병거를 더 크게 보았고,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현실이라는 상황에서 가장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현재 상황을 해석해야 하는데 현재 상황으로 말씀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신학과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렙에게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옷니엘에게는 정복의 땅이었습니다. 유다에게 가나안은 철 병거로 막힌 땅이고 베냐민에게는 공존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믿음과 신학 그리고 세계관으로 보고 있습니까?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는 "현실"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해석" 속에 삽니다. 문제를 크게 보는 사람의 신학은 무기력한 하나님이나 무관심한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현재 고난은 장차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 고난은 이미 갚아진 죄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선한 아버지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감사와 찬송을 중심으로부터 드릴 수 있게됩니다. Support the show

  6. Aug 31

    사사기 1장 1-10절

    댓글 창 개요 모세를 통해 애굽의 노예 생활을 떠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여호수아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아직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후계자도 세우지 않고, 여호수아는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한 지도자가 아닌 지파들의 협의에 따라 통치되는 집단 통치 체제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각 지파는 각자에게 분배된 땅을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의 죽음 후 유다 지파가 처음으로 임하는 정복 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먼저 모든 지파가 모여 하나님을 찾은 이스라엘이 누가 먼저 정복 전쟁에 임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결과 유다 지파가 지목됩니다.  1-2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시작합니다. 4-5절,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묵상 포인트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사사기에서는 신앙의 성숙함은 모든 것이 잘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의지하던 것이 사라질 때 제대로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구심점이자 버팀목이던 여호수아의 죽음은 국가적 위기이자 신앙적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의 첫 반응은 여호와께 여쭙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당장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다는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합니다. 분명 협력은 좋은 것이나 무엇이 문제일까요?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판단을 더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위험한 출발입니다. 우리도 대부분 말씀을 대놓고 거역하지 않습니다. 대신 조금 보태고, 조금 수정하고, 조금 더 추가해서 안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장의 이 모습은 끝에 가서는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행위이기 전에 하나님께 늘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더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늘 인정하는 삶입니다. 끝으로 "아도니 베섹"이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도니 베섹"은 "베섹의 군주"라는 호칭입니다. 그는 단순한 전쟁 포로라기보다는 사사기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7절,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여기서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는 사사기에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압제를 당하고 가나안과 타협하면 가나안에게 굴복당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과응보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언약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원칙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순종을 심고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Support the show

  7. Aug 27

    이사야 37장 1-20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에는 랍사게의 외침을 들은 히스기야가 그의 고관들과 제사장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4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 랍사게의 말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즉 얕잡아보는 말이라는 것을 이사야에게 상기시키며 이사야에게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산헤립이 칼에 죽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6-7절,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자신의 미래를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산헤립은 여전히 칙서를 보내 여호와를 신뢰하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10절, "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과연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전쟁이나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미 수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전력을 과시할 만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사실 이 고민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일 닥치는 질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히스기야가 직접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14-15절, "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묵상 포인트 -히스기야는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랍사게의 조롱을 들으셨을 터이니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면 안 되지 않는가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여기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달리 정치적 해결을 도모하지 않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사정을 아뢸 뿐이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며 잠잠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미리 정해놓고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바를 솔직히 말씀 드리며 간구하지만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기다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힘쓰고 있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얼마나 주의 말씀을 찾고 그분 앞에 잠잠히 기다리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나요? 세상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어둠을 택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앞에 "산헤립"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는 "랍사게"는 무슨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왕들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경제적 안정, 건강, 노후 혜택, 만족스러운 관계, 가족의 번영 등등 좋은 것이나 절대적인 요구를 하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라면 아무리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들이라도 절대적인 것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주앞에 나아가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오직 주님만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해 달라고 간구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Support the show

  8. Aug 26

    이사야 36장 1-22절

    댓글 창 개요 오늘 본문은 앗수르의 산헤립이 그의 지휘관들을 보내 유다의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위협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히스기야와 애굽은 물론 심지어는 여호와 하나님도 신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열방의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 민족을 구해 내지 못했으니, 여호와 하나님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5-7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그러면서 유다 땅만큼이나 좋은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노예와 포로 생활을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16-17절,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묵상 포인트 앗수르의 공격 앞에서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반응은 상반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했지만(7-8절),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결과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언약 백성을 구해 내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유다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유다의 적은 물러갑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능력과 그동안의 실적을 굳게 믿었습니다. 유다를 무시하고 애굽을 무시할 정도로 그의 성공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은 그의 "성공"은 그가 의로워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죄의 열매를 맛보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잠시 산헤립을 사용하시는 것임을 교만에 사로잡힌 산헤립은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하나님을 무시한 죄악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우리도 세상에게 무시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산헤립"은 무엇입니까? 당장 그것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창조주 하나님 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기준이 된 신앙은 버려야 할 부패된 마음입니다. 세상이 하는 말을 과감히 뒤엎으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이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이제 조만간 다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임을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선택으로 증거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주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을 위하여 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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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