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인(人) 말씀묵상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1. 19h ago

    70년대 통기타 7: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댓글 창 [Intro: solo acoustic blues guitar, slow 12/8, a soulful melodic phrase with blue notes] [Refrain: hushed, alone, almost to herself]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1: raw honest confession, guitar answers each line]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Refrain: warmer, 영광 할렐루야 turns toward light]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Interlude: blues guitar fill, soulful] [Refrain: heavier, deeper sorrow]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2: aching, a lump in the throat, every 오 주여 an outcry] 나 슬픈 일 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Refrain: reaching outward, earnest prayer]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Instrumental Break: featured blues guitar solo, soulful bends, slides, building] [Refrain: building strength, faith rising]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Verse 3: tense, facing the tempter] 저 마귀 유혹합니다 [Burst: full-voiced cry for victory, raw power, long held note, guitar strummed hard]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하소서 오 주여 [Final Refrain: strongest, triumphant faith, 영광 할렐루야 as the peak]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Outro: suddenly hushed, peaceful, held long] 영광 할렐루야 [End: blues guitar closes with a soft phrase, fades] Support the show

    70년대 통기타 7: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2. 3d ago

    시편 18편

    댓글 창 요약 시편 18편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제왕적 감사시’ 혹은 ‘승리의 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 이 시편은 다윗의 파란만장했던 생애와 모든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쓰였습니다. 시인은 단순한 위기 모면을 넘어, 폭풍과 벼락을 대동하고 임하시는 우주적 왕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자가 되심을 웅장한 글로 묘사합니다. 사울의 추격을 비롯한 수많은 대적들의 위협을 이겨 내고 생애의 황혼기에 지난날을 회고하며 부른 신앙의 노래입니다. 문맥상 이 시편은 앞선 16편, 17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한 세트를 이룹니다. 16편이 죽음을 넘어서는 굳건한 신뢰를, 17편이 억울한 고난 속에서 의로운 판결을 구하는 탄원을 담았다면, 18편은 마침내 그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감사로 절정을 이룹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여호와만이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참된 창조주이시며, 고통받는 당신의 종을 위해 기꺼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 전능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절) 묵상 포인트 반석 다윗은 하나님을 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2절 한 절 안에서만 여덟 가지 이름이 쏟아집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내가 피할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다윗은 굴과 바위틈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삼상 22:1; 24:2). 그 바위는 몸을 숨겨 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다윗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노래합니다. 정말 나를 지켜 주신 분은 여호와셨다고. 눈여겨볼 것은 모든 이름 앞에 붙은 ‘나의’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만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따르던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고전 10:4). 땅이 흔들려도 우리는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딛고 선 반석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절) 부르짖음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다윗은 자신이 겪은 위기를 꾸미지 않습니다. 줄에 묶이고 물살에 휩쓸려 숨이 막히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이 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계획을 세운 것도, 자신을 변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잘 정돈된 기도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성전에서 들으셨습니다.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우리는 종종 마음이 정리되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정리되지 않은 울음도 하나님의 귀에 닿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도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히 5:7).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버림받은 자의 부르짖음을 우리 대신 지셨습니다(마 27:46). 그래서 오늘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아버지께 들립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절) 내려오시는 하나님 7절부터 장면이 바뀝니다.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가 요동합니다. 연기와 불, 흑암과 빽빽한 구름, 우박과 번개가 하늘을 채웁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시내산에 강림하시던 날을 떠올리게 합니다(출 19:16~18). 15절에서 물 밑이 드러나는 장면은 홍해가 갈라지던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출 15:8). 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온 우주의 왕이 움직이십니다. 그 한가운데 9절이 있습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하나님은 멀리서 도움만 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늘을 드리우시고 친히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눅 2:7). 다윗을 위해 하늘을 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곳에 있어도, 그분이 내려오지 못할 만큼 깊은 곳은 없습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9절)Support the show

  3. 5d ago

    시편 16편

    댓글 창 요약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는 짧은 부르짖음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그러나 시인은 두려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곧 고백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아룁니다(2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뿐이라고 말합니다(4절). 그리고 자신의 참된 기업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산업이요 잔의 소득이십니다(5절). 여호와께서 오른쪽에 계시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8절). 시는 무덤 너머에서 끝납니다. 주께서 그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10절). 오순절에 베드로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졌다고 전했습니다(행 2:25-31).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행 13:35-37). 다윗은 죽었고 그의 몸은 썩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 시는 우리의 노래가 됩니다. 묵상 포인트 다윗의 첫마디는 지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위험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위험 앞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는 먼저 어려움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2절). 이것이 주께 피하는 일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해서만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밖에는 복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피합니다. 세상은 많은 피난처를 내밉니다. 성공과 인정과 통제가 작은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조차 그럴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것을 따르는 자의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4절). 쉼을 약속하지만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다른 피난처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다시 집으로 부릅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성과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받아 주신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2절)다윗은 여호와께서 좋은 몫을 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그의 산업이시라고 고백합니다(5절). 선물은 주시는 분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절). 그의 형편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지켜 달라고 부르짖었으니까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실 때, 우리 삶의 경계선은 불평의 자리가 아니라 쉼의 자리가 됩니다. 만족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기분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날마다 우리 앞에 모실 때 자라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절). 날마다 마음을 의도적으로 그분께 돌리는 일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5~6절)이 시는 죽음 너머까지 바라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10절).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윗이 죽어 장사되었고 그 무덤이 아직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고 말한 것입니다(행 2:29-31). 예수님이 바로 썩음을 당하지 않으신 거룩한 자이십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에 마지막 절은 이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절). 생명의 길은 빈 무덤을 지나갑니다. 우리의 기쁨은 깨지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사신 구주께 닻을 내린 기쁨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0~11절)Support the show

  4. Oct 22

    야고보서 4장 13-5장 6절

    댓글 창 요약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두 번이나 “들으라”고 말합니다(4:13; 5:1). 바쁘게 달려가는 우리를 멈춰 세우는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첫 번째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겠다는 사람들이지요(4:13). 평범한 사업 계획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빠진 것을 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4:14). 우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니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합니다(4:15).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4:16). 그리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4:17). 두 번째는 부한 자들을 향한 말입니다(5:1~6). 구약 선지자들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울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고,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고 합니다(5:2~3). 바로 그 녹이 그들에게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습니다(5:3). 이어서 야고보는 그 재물을 어떻게 모았는지 밝힙니다. 밭에서 추수한 품꾼들에게 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삯이 소리를 지릅니다. 추수한 자들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5:4). 그들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며 살륙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했습니다(5:5).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 그 의인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5:6). 작은 것 하나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4장 13절부터 5장 6절까지 야고보는 한 번도 “형제들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4장 11절에서 그렇게 불렀고, 5장 7절에서 다시 그렇게 부릅니다. 이 단락에서는 들을 귀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외치는 선지자처럼 말합니다. 계획하는 사람들과 부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일이 자기 것인 것처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묵상 포인트 1. “주의 뜻이면” (4:13~17) 13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 일 년, 장사, 이익.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데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 문장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계획 세우는 일 자체를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계획은 선하고 신실한 일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보는 것은 계획 뒤에 있는 마음입니다. 잠언은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5절)우리는 왜 내일이 우리 것인 양 계획할까요? 교만 때문일 때도 있고, 두려움 때문일 때도 있습니다. 내면가족체계(IFS)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모든 것을 손에 쥐려고 미리부터 아주 열심히 일한다고 관찰합니다.1 목록을 만들고,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고, 아픔보다 한 걸음 앞서 가려고 애씁니다. 저는 이 관찰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서 바쁘게 계획하는 그 부분은 사실 겁먹은 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 겁먹은 마음에 통제보다 더 나은 것을 건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의 뜻이면”은 계획 끝에 붙이는 행운의 주문이 아닙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고전 4:19). 내일을 누구의 손이 붙들고 계신지 아는 자녀의 자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손이 어떤 손인지 압니다. 이미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17절을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인생이 안개라면, 오늘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내일로 미룰 수는 없겠지요. 코치들은 이 간격을 잘 압니다. 국제코칭연맹(ICF)의 핵심 역량 가운데 ‘고객의 성장 촉진’(Facilitates Client Growth)이 있습니다. ICF는 이것을 고객과 함께 배움과 통찰을 행동으로 바꾸어 가는 일로 설명합니다.2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통찰은 좋은 생각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의지력만으로 앎에서 삶으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은혜가 먼저 우리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움직일 수 있습니다.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5:1~3) “울고 통곡하라.” 무거운 말씀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읽기 쉽습니다. 너무 서둘러 그렇게 읽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야고보가 열거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재물, 옷, 금과 은.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있습니다. 좀이 옷을 먹고, 녹이 금을 먹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 녹이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고 말합니다(3절). 쌓아 둔 것은 우리 밖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천천히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하지요.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2절)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마 6:19). 그리고 그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3절)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바로 앞에서 인생이 안개라고 말했습니다(4:14). 그러니 얼마나 가졌느냐만 물을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그 보물이 돈일 것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안정, 좋은 평판, 혹은 잘되어 보이는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꽉 붙잡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 손 안에서 썩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참으로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좀도 녹도 건드릴 수 없는 보물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손을 펼 수 있습니다. 3.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4~6) 4절은 소리가 들리는 듯한 말씀입니다. 주지 않은 삯이 소리를 지릅니다. 추수한 자들도 웁니다. 그리고 그 우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닿았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4절)하나님은 품삯에 마음을 쓰십니다. 율법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5). 미뤄진 품삯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두 방향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 무언가를 쥐고 있습니다. 품삯일 수도 있고, 시간이나 관심, 혹은 해 놓은 약속일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내어 주라고, 제때에 내어 주라고 말합니다. 반대편에 서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지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그 오래된 억울함을 아직도 안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부르짖음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분은 하늘 군대의 주님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여러분은 결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6절은 조용하게 끝납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저는 야고보가 먼저 힘 있는 자들에게 짓밟힌 의로운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분을 “그 의인”이라 불렀고, 듣는 이들이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행 7:52). 베드로는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썼습니다(벧전 2:23). 의로우신 분이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놓임을 받게 하시려고요. 그 은혜는 억눌린 사람에게 닿습니다. 회개하는 억누른 사람에게까지

About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