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인(人) 말씀묵상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1. 1d ago

    고린도전서 16장

    댓글 창 사랑으로 행하라쥬빌리 코치  ·  Jubilee Coach  ·  말씀 묵상 시리즈 바울은 이제 길고 긴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분열과 소송, 음행, 성찬을 둘러싼 혼란, 은사의 오용까지, 그는 고린도 교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열여섯 장에 걸친 권면 끝에 사도는 펜을 내려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짧은 말을 남깁니다. 복잡한 말이 아닙니다. 부모가 문을 나서기 직전 자녀에게 남기는 당부와도 같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6:13–14 — 개역개정 한 절 안에 네 가지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라. 용기를 내라. 강건하라.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명령들을 하나의 군사적 명령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다는 것이 세상의 염려에서 자유로워져서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치 보초가 자리에서 잠들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정작 지켜야 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깨어 있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탄을 경계하지 못했고, 유혹과 나태함과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지 못했고, 주님의 재림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가는 컸습니다. 표현에 대한 짧은 설명입니다. 오래된 번역본은 이 명령을 남자답게 행하라로 옮겨서 마치 바울이 교회 안의 남성에게만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는 구약 헬라어 성경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전쟁을 앞두고 강하고 담대하라 말할 때도 쓰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할 때부터 고린도 교회의 남녀 성도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고, 지금도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기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덧붙입니다. 맥아더 목사는 이 편지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선 열다섯 장에서 바울이 다룬 거의 모든 갈등, 곧 편애와 소송과 은사를 둘러싼 교만은 결국 한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지식도 있었고 은사도 있었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사랑 없는 강함은 거칠어지고, 강함 없는 사랑은 무엇이든 눈감아 주는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둘 다 함께 붙들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이 편지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고린도전서 16:15–16 — 개역개정 바울은 편지를 마치기 전에 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 칭찬합니다. 스데바나입니다. 그는 아가야 지역 전체에서 바울의 사역을 통해 가장 먼저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었고, 그날 이후로 자신의 집안 전체를 성도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교회를 섬기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면, 교회는 마땅히 그 사람을 존중하고 기꺼이 그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스승이 누구인지, 자기 은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두고 다투기 좋아했던 고린도 교회 안에서, 스데바나는 조용히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직함도 없고 무대도 없었습니다. 오직 섬김뿐이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린도전서 16:19–20 — 개역개정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고린도와 낯선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몇 해 전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했을 때, 이 부부는 고린도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며 일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바로 그 교회를 함께 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무렵 그들은 에베소로 옮겨 갔고, 그들의 집은 성도들이 모이는 처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전역 교회의 문안과 함께 이들의 인사를 고린도 교회에 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명령을 더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이것은 그 시대에 결코 작은 몸짓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는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공장소에서조차 거의 접촉하지 않던 도시였습니다. 하물며 동등한 자로서 서로 끌어안는 일은 더욱 드물었습니다. 칼빈은 이 인사를 서로 사랑한다는 진실한 표시로 보았고,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와야 하며, 거룩하다는 것은 곧 순결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맥아더 목사는 이 짧은 명령을, 이 마지막 단락 전체에 흐르는 사랑의 일곱 가지 모습 가운데 마지막으로 꼽았습니다. 전도와 섬김과 순종과 교제와 존중과 환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정함입니다. 신분을 두고 다투던 교회에게, 바울은 서로를 한 가족으로 끌어안으라고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린도전서 16:22–24 — 개역개정 서로를 끌어안으라는 따뜻한 명령 바로 다음에, 바울의 어조는 날카로워집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칼빈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한 적도 없는 외부인을 향한 말이 아니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결코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말입니다. 거짓 평안 속에 안주하는 자기 양 떼를 차마 그냥 둘 수 없었던 목회자의 단호한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거의 같은 호흡으로, 초대 교회 성도들이 헬라어 편지를 쓰면서도 자기 언어로 기도했던 단어 하나를 그대로 적습니다.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개혁주의 노트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게할더스 보스는 신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 사이에 살아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일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 날 사이입니다. 마라나타라는 한 단어 안에 이 둘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초대 교회 안에서 거짓 신자에게는 경고로, 진실로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소망의 기도로 함께 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주를 마무리 짓는 그 단어가, 동시에 갈망을 열어 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와 함께 할지어다. 이 본문의 모든 명령보다 은혜가 먼저 옵니다. 바울은 은혜를 얻기 위해 굳게 서고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명령한 모든 것, 곧 깨어 있음과 섬김과 거룩한 입맞춤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 안에서 그 은혜가 만들어 내는 열매일 뿐입니다. 코치 브라이언의 질문 요즘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그 가운데서도 당신을 지탱해 온 것은 무엇이었나요? 인정받지 않아도 기꺼이 섬기고 싶어 하는 당신 안의 어떤 부분이 있나요? 그 부분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누구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고 싶나요?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Support the show

    13 min
  2. 6d ago

    참교육보다 잔인한 현실

    댓글 창 그녀는 체육 시간을 마치며 아이들에게 스쿼트를 시켰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She had her students do a few squats to cool down after gym class. That was the whole of it. 그날 이후 After That Day 사건 지난해 6월, 경남 김해의 한 중학교. 체육교사 A씨는 1학년 1교시 수업을 마무리하며 학생들과 스쿼트로 정리 운동을 했습니다. 수업 계획에 있던 평범한 마무리였습니다. 사흘 뒤, 한 학생의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이 호락호락하게 대할 애가 아니에요." 원어민 영어와 골프까지 시켜 아파트 두 채 값을 넘게 들여 키운 아이라는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틀 뒤에는 아버지가 학교로 직접 찾아왔습니다. 학부모는 교사가 아이의 귀를 잡고 끌고 갔다거나, 스쿼트와 함께 '투명 의자' 자세를 가혹하게 시켰다는 등 여러 주장을 하며 A씨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A씨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항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The Incident Last June, at a middle school in Gimhae, Gyeongnam. PE teacher A씨 closed her first-period class with the same cooldown most gym classes use — a few squats. Nothing out of the ordinary. Three days later, a student's grandmother called. "She's not someone you can just push around carelessly," she said, adding that the family had spent more than two apartments' worth on the boy's native-speaker English lessons and golf coaching. Two days after that, the father came to the school in person. The parents filed a child-abuse complaint against A씨, alleging she had pulled their son's ear and dragged him, and forced a harsh "invisible chair" stance alongside the squats. A씨 said none of it had happened. The complaints did not stop. 악마의 증명 The Devil's Proof 시간 경찰은 수사 끝에 무혐의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아동학대처벌법상, 무혐의라도 사건은 자동으로 검찰에 넘겨집니다. 검찰도 무혐의. 학부모가 항고한 고등검찰청도 무혐의. 재정신청까지 거친 법원도 무혐의. 경찰,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법원. 네 번의 독립된 판단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데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게 더 어렵다는 말, '악마의 증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1년 동안 A씨는 불면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고, 신혼이었던 그녀는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했습니다. A Year Police investigated and found no grounds for any charge. But under Korea's child-abuse law, even a no-fault finding is automatically forwarded to prosecutors. The district prosecutors: no grounds. The parents appealed to the high prosecutors' office: no grounds. They petitioned the court itself: no grounds. Police, district prosecutors, high prosecutors, and the court — four separate, independent bodies, the same conclusion each time. It took nearly a year. There's an old phrase for this: proving a negative is harder than proving a positive — the "devil's proof." Through that year of insomnia and anxiety, A씨, newly married, lost the pregnancy she was carrying. "하지도 않은 일로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I kept wondering why I had to hear this, for something I never did." — A씨 / 체육교사, SBS 인터뷰 (2026) · 원본 보도 보기 참교육보다 잔인한 현실 Crueler Than the Drama 대조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1년 후인 2026년 6월,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전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창설된 가상의 정부 기관 '교권보호국'이 악성 민원을 일으킨 학부모와 학생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이야기입니다. 시청자들은 그 카타르시스에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는 이미 '교권보호위원회'가 있습니다. A씨도 그곳에 신고했습니다. 위원회는 학부모의 교육활동 침해를 인정하고 특별교육 4~5시간을 명령했습니다. 위원회가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조치입니다. 그런데 이조차 강제력이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아도 최대 300만 원의 과태료뿐입니다. 학부모는 그 결정에도 불복해 행정쟁송을 시작했고, 도리어 A씨를 명예훼손, 모욕, 무고 혐의로 다시 고소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정의가 통쾌하게 집행됩니다. 현실에서는, 도움을 구한 교사가 오히려 더 많은 소송에 노출됩니다. '참교육보다 잔인한 현실'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The Contrast A full year after the incident — in June 2026 — the Netflix series 참교육 ("Teach You a Lesson") hit #1 worldwide. Its premise: a fictional government bureau, created to fix Korea's collapsed teacher authority, swoops in and delivers satisfying justice against abusive parents and students. Audiences loved the catharsis. But a real version of that bureau already exists — the 교권보호위원회, the Teacher's Rights Protection Committee. A씨 reported her case to it. The committee found that the parents had interfered with her teaching and ordered four to five hours of mandatory education — the strongest measure it's allowed to impose. It has no enforcement power. Skipping it costs, at most, a fine of roughly 3 million won. The parents are now contesting even that decision, and have filed new charges against A씨 — for defamation, insult, and false accusation. In the drama, justice arrives, and it is cathartic. In reality, the teacher who asked for help found herself facing more lawsuits, not fewer. "Crueler than the drama" turned out not to be an exaggeration. 죄 없는 자의 고난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 성경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편 7편에서 거짓 고발 앞에 이렇게 아룁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를 행하였거든, 내 손에 죄악이 있거든..."(시편 7:3-4) —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께 맡기는 서약입니다. 시편 35편은 더 짧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강포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추궁하며"(시편 35:11).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으로 고발당해 옥에 갇혔습니다(창세기 39장). 다윗은 거짓 증인들에게 쫓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짓 증인들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로우신 재판장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아홉째 계명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Q76).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진리에 해가 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이웃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모든 것"입니다(Q78). 거짓 진술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이름과 삶을 향한 공격입니다. Scripture Scripture is no stranger to this kind of story. Facing false charges in Psalm 7, David swears an oath before God: "O LORD my God, if I have done this, if there is wrong in my hands..." (Psalm 7:3–5) — innocence entrusted entirely to God's judgment. Psalm 35 says it more bluntly: "Malicious witnesses rise up; they ask me of things that I do not know" (Psalm 35:11). Joseph was falsely accused by Potiphar's wife and thrown into prison for it (Genesis 39). David was hunted by false witnesses. And Christ stood silent before false witnesses of His own: "When he was reviled, he did not revile in return... but continued entrusting himself to him who judges justly" (1 Peter 2:23).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states the ninth commandment plainly: "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thy neighbor" (Q76). What it forbids is "whatsoever is prejudicial to truth, or injurious to our own or our neighbor's good name" (Q78). False accusation is never just a lie. It is an assault on a person's name, and on the life built around it. 무너진 방패, 흔들리지 않는 정의 The Shield That Failed, the Justice That Didn't 제도와 그 너머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국가와 재판 제도를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의 은혜로 보았습니다. 통치자의 일은 "죄 없는 자를 책임지고, 그들을 변호하며,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썼습니다(Institutes, 4.20.9). 이런 의미에서 경찰, 검찰, 법원이 네 번이나 A씨의 무죄를 확인한 것은 — 느리고 고통스러웠지만 — 그 제도가 결국 제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교권보호위원회처럼 더 빠르고 가벼워야 할 안전망이, 강제력 없는 형식만 남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공동의 은혜가 약속하는 보호와, 실제로 교실에 도착하는 보호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습니다. 그 간극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데이빗 파울리슨은 분노를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정당한 인식이라 말합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누구에게, 어떻게 가져가느냐입니다(Powlison, Good and Angry, 2016). A씨의 싸움은 결국 법정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잃은 것 — 아이, 잠, 평안 — 은 어떤 판결문도 돌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습니다. 정의를 구하기 위해 제도를 사용하는 것(다윗도,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과, 모든 것을 다 바로잡을 수 없는 제도의 한계를 알고 더 깊은 곳 — 의로우신 재판장 — 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The System and What's Beyond It In the Institutes, Calvin described civil government and the courts as a form of God's common grace, given to a fallen world precisely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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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Jun 23

    고린도전서 13장

    댓글 창 고린도전서 13장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자주 읽히고, 아름다운 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낭만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은사 때문에 서로 비교하고, 자랑하고, 상처 주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3장은 12장과 분리해서 읽으면 안 됩니다. 12장이 “우리는 한 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13장은 “그 몸은 사랑으로만 건강하게 움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31 — 개역개정 바울이 말하는 “가장 좋은 길”은 은사를 부정하는 길이 아닙니다. 은사를 사랑으로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추상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은 먼저 우리에게 “더 사랑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이미 사랑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첫째 — 사랑이 없으면  ·  Point One — Without Love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아무 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1–2 — 개역개정 바울은 일부러 가장 놀라운 은사들을 언급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예언, 모든 비밀과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자기 몸을 내어주는 헌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앞에 한 가지 조건을 붙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가장 아름다운 말도 소음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장 깊은 지식도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장 큰 헌신도 자기중심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은사가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수고가 모두 헛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은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립니다. 은사는 우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사람을 세우는 통로가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 무대가 됩니다. 둘째 —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입었습니다  ·  Point Two — Love Took Flesh in Christ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5 — 개역개정 바울은 사랑을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오래 참음, 온유함,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하지 않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 이 모든 표현은 고린도 교회의 실제 문제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참아주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시기했습니다. 자기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서로에게 무례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의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회개해야 할 구체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복음의 순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먼저 우리의 부족함을 폭로합니다. 나는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온유하지 못합니다. 시기하고 자랑하고, 내 유익을 먼저 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은 우리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사랑의 모범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나도 더 잘해야지”라는 도덕적 부담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라는 복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받은 사랑을 우리의 말과 태도와 관계 안에서 조금씩 흘러가게 하십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6–7 — 개역개정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고,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진리와 사랑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예시를 넘어 사랑의 성취이십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빚어져 갑니다. 셋째 — 사랑은 남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고린도전서 13:8, 10 — 개역개정 바울은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언젠가 멈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우리의 역할도 지나갑니다. 우리의 직분도 지나갑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지나갑니다. 우리가 붙들고 자랑하던 능력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12 — 개역개정 우리는 지금 희미하게 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를 붙들되 겸손히 붙들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 개역개정 믿음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붙듭니다. 소망은 아직 오지 않은 나라를 기다립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께 받은 생명을 지금 이웃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참된 소망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복음의 기초  ·  Gospel Foundation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에게 단순히 “더 사랑하라”고 말하는 장이 아닙니다. 먼저 “너는 사랑받았다”고 말하는 장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온유하게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기준일 뿐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은사를 없애지 않습니다. 사랑은 은사를 살립니다. 사랑은 지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식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열심을 식히지 않습니다. 사랑은 열심을 오래 견디게 만듭니다. 사랑은 교회를 감상적인 공동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답게 만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을 우리 안에 부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은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받았기에 사랑합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고,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이웃을 살리는 사랑으로 빚어 가십니다. 쥬빌리 코치의 질문 1. 은사와 사랑 (Gifts and Love) 내가 가진 은사나 강점이 누군가를 세우기보다 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1. Gifts and Love Is there any place where your gifts or strengths are being used more to prove yourself than to build up another person? 2. 그리스도의 사랑 (Christ’s Love)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볼 때, 오늘 내 마음이 가장 먼저 책망받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이미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2. Christ’s Love When you look at the love described in 1 Corinthians 13, where do you first feel exposed? And in that very place, how has Jesus already loved you? 3. 몸을 입은 사랑 (Embodied Love) 오늘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조금 더 오래 참고, 조금 더 온유하게 반응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Embodied Love As someone who has been loved by Christ, who is one person toward whom you are being invited to respond with greater patience and kindness today?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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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Jun 22

    우리가 교권보호국을 원하는 이유

    댓글 창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교권보호국이 실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I'll be honest. I wanted him to be real. 고백 검은 정장 차림의 감독관 나화진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장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단순히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년간 쌓인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악성 민원에 지쳐 학교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생님들의 이야기, 가해 학생을 지도했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 그것들이 드라마 속 한 장면으로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참교육〉은 6월 5일 공개 이후 단 3일 만에 64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글로벌 비영어권 1위에 올랐습니다. 한국을 포함해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0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빠르게, 이토록 넓게 퍼진 이유 — 저는 그것이 단순히 액션의 쾌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어 이야기 · Word Study 참교육 참 (眞) — 진실한, 올바른 / true, genuine, authentic 교육 (教育) — 가르치고 기르는 것 / education, formation, nurture 원래 '참교육'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범 당시 "인간을 위한 진실된 가르침"을 뜻하는 공식 슬로건이었습니다.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두루 사용되어 온 이 단어는,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단죄" 혹은 "응징"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드라마 제목은 이 이중성을 의도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Originally coined as a progressive education reform slogan meaning "true and humane teaching," the term has been adopted across Korea's political spectrum, while evolving in internet usage to also connote punishment or comeuppance. The drama title holds both meanings deliberately. 현실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학교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이후 밝혀진 것은, 그가 학부모의 지속적인 민원과 압박 속에서 극도의 직무 스트레스를 겪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2023년 9월 4일 — 49재에 해당하는 날 — 전국에서 약 20만 명의 교사들이 "공교육 멈춤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 해에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공립학교 교사는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 1월부터 2023년 6월까지, 100명의 공립학교 교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 중 57명은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드라마 〈참교육〉은 이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극 중 교사 '최가윤'의 죽음은 서이초 사건을 의도적으로 연상케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은 드라마가 "무너진 교실의 민낯과 손발이 묶여버린 교사들의 절망감을 가감 없이 고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갈망 교권보호국의 설정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국가가 공무원에게 물리적 개입 권한을 부여해 학교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비현실성 안에 매우 현실적인 갈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가 피해자를 외면할 때, 누군가가 실제로 나타나서 피해자 편에 서주는 것. 그것은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드라마의 감동 포인트는 폭력 장면이 아닙니다. 교장이 눈치를 보고, 교육청이 뒤에 숨고,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 드디어 누군가가 공무원증을 내밀며 말합니다: "이 학교를 참교육 하겠습니다."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정의가 실제로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는 경험입니다. 저는 그 카타르시스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진지하게 신학적으로 읽고 싶습니다. 정의에 대한 갈망은 어디서 오는가 Where Does the Hunger for Justice Come From? 하나님의 형상 개혁신학의 시각에서 볼 때, 불의 앞에서 느끼는 분노는 감정적 과잉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며 분노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I.15.4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성의 빛, 마음의 올바름, 모든 부분의 건전함"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불의를 보며 분노하는 양심은 타락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의 잔향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하나님께 직접 가져갔습니다. 시편 82편 3-4절: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며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낼지니라." 교권보호국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이 오래된 시편의 갈망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국가는 검을 이유 없이 가지지 않는다 — 그러나 현실의 간극 The Governing Authority Does Not Bear the Sword in Vain — But the Gap 로마서 13장 로마서 13장 4절은 국가 권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이 본문은 국가 권위가 하나님께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신 도구라고 말합니다. 교권보호국은 바로 이 신학적 자리에 있는 상상력입니다 — 국가 권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하는 기관. 그런데 현실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법은 있지만 집행되지 않습니다. 2023년 9월, 교권보호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현장 교사들은 여전히 "체감하는 변화는 미비하다"고 말합니다. 그 간극 — 제도가 약속하는 것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 사이의 간극 — 이 바로 〈참교육〉이 파고드는 자리입니다. 씁쓸함 〈참교육〉을 보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통쾌하지만 씁쓸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왜일까요? 드라마가 끝나면 현실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나화진은 화면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씁쓸함은 드라마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한 신호입니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지 한 편의 액션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짜 정의입니다. 단지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건에서. 단지 이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단지 지금만이 아니라, 영원히. 그것은 어떤 인간 제도도, 어떤 정부 기관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복음이 말을 걸어옵니다. 복음 이사야 11장 3-4절은 오실 메시아 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가난한 자를 공의로 심판하며 세상의 겸손한 자를 정직으로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것은 교권보호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상상입니다. 뇌물로 움직이지 않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절차 뒤에 숨지 않으며, 오판하지 않는 심판자. 모든 피해자의 편에 서되 자신이 그 피해를 직접 담당하시는 분.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세상에 오셔서 가장 큰 불의 — 죄 없는 자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 — 를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정의의 부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정의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정의가 마지막 말이 되지 않으리라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나화진은 피해자의 편에 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피해자가 되셨습니다. 그 차이가 복음입니다. 위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지금 교단에 서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학부모 민원이 두려워서 아이들에게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분. 교권보호위원회를 거쳤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분. 드라마를 보면서 통쾌했다가 집에 돌아와 다시 한숨을 쉰 분. 당신의 자리에서 매일 버티고 계신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제도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분노는 정당합니다. 그 피로는 진짜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느 교육청도, 어느 교장도 보지 못한 것을 보시는 분이. 아무도 서주지 않은 그 자리에, 먼저 서신 분이. 그분은 교권보호국보다 늦지 않습니다. 그분은 판타지 드라마의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분은 실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분은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버티게 하는 닻입니다.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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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고린도전서 12장

    Jun 19

    고린도전서 12장

    댓글 창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은사가 넘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왜 저 사람은 자기 은사를 저렇게밖에 쓰지 못할까?" 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은사가 많은 교회였지만,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비교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전서 12:1 — 개역개정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넘쳐흘렀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느냐고(2절). 진정한 신령함과 거짓 신령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입니다. "예수가 주시라"(3절).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냅니다. 첫째 — 같은 성령  ·  Point One — The Same Spirit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 — 개역개정 이 세 절에는 성부, 성자, 성령 —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등장합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바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도 각각의 위격과 역할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시듯이, 그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들도 다양하면서도 같은 원천을 가집니다. 다양성은 불일치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은사에는 서열이 없습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서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각자를 통해 나타나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Calvin, *Commentary on 1 Corinthians*, 12:4). 즉, 은사는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통로가 된 것입니다. 통로가 통로를 비교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 개역개정 7절의 "유익"은 개인의 영적 만족감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어에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의 덕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분별, 방언, 통역(8-10절) — 이 은사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멈추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축적입니다. 둘째 — 성령의 주권  ·  Point Two — The Spirit's Sovereignty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11 — 개역개정 "그의 뜻대로." 이 네 글자가 핵심입니다. 어떤 은사를 얼마나 받을지는 받는 사람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결정하십니다. 이것은 얼핏 제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깊은 자유입니다. 나는 없는 은사를 억지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은사를 부러워하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지금 이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을 나를 통해 공급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그 필요에 맞춰 은사를 분배하신다고(Ferguson, The Holy Spirit, 1996, IVP). 은사를 시기하는 것은 그 은사를 나눠주신 성령님의 지혜를 불신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공동체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셋째 — 하나의 몸  ·  Point Three — One Body 12절부터 바울은 은사 목록에서 몸의 비유로 자연스럽게 전환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닙니다. 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은사가 놓이는 맥락 — 즉 교회라는 몸 — 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몸이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2–13 — 개역개정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이 구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구분이 한 성령 안에서 녹아든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나누어 놓은 선을 그대로 가져오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공동체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서열과 경계가 복음 안에서 재구성되는 곳입니다. 팀 켈러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포용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Keller, Center Church, 2012, Zondervan). 바울은 이어서 아주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합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15절).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16절). 몸 전체가 눈이라면 소리는 어디서 들을 것이냐고(17절). 이 비유를 읽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지만 그 안에 아주 진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부정함으로 몸에서 이탈하려는 지체는, 사실 자신도 공동체도 모두 해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거부하면, 그 자리는 비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2:18, 21 — 개역개정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일입니다. 화려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조용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방언이나 예언처럼 눈에 보이는 은사가 지식이나 가르침의 은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히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꼭 필요합니다(22절).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더 큰 존귀함을 입힙니다(23절).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꼭 필요합니다.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하나님은 더 큰 존귀함을 입히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 개역개정 26절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함께 고통받는다. 함께 기뻐한다. 이것은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몸의 현실입니다. 내 손이 아프면 내 온 몸이 그것을 느낍니다. 공동체 안에 고통받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내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공동체 안의 고통에 스스로를 절연시킨 채 살아갑니까? 가장 행복한 공동체는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장 건강한 공동체는 고통을 함께 지는 곳입니다. 복음의 기초  ·  Gospel Foundation 그렇다면 왜 은사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임재를 공동체 안에 나타내십니까? 그 이유는 은사가 궁극적으로 은사 수여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은사는 모든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가르침의 은사는 권위 있는 교사이셨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언의 은사는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섬김의 은사는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몸의 각 지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쏟아부으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은사는 타인을 위해 쏟아붓는 것입니다. R.C. 스프라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참된 은사는 십자가형을 닮아 있다. 자신을 낮추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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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Jun 16

    고린도전서 7장 | 독신이 더 낫을까요?

    댓글 창 7장부터 바울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여러분이 쓴 것들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이제는 바울 자신의 우려 사항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직접 물어온 질문들에 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편지 한쪽 면만 있습니다. 그러나 답변을 읽다 보면 그들의 질문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육체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더 거룩해지려면 결혼도,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것이 낫다고. 그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독신이 결혼보다 더 거룩한 상태가 아닌가요?" 이 질문은 교회 역사 내내 반복되어 왔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직자 독신제도를 통해 그 대답을 한쪽 방향으로 굳혀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은 훨씬 균형 잡혀 있고 훨씬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더 복음적입니다. 1부 · 몸은 중요합니다 · The Body Matters (vv. 1–7)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린도전서 7:3–4 — 개역개정 이 구절은 고대 세계에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그리스 문화에서 여성은 남편의 소유로 여겨졌습니다. 아내에게 남편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발상 자체가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확히 그렇게 말합니다. 남편의 몸이 아내에게도 속하고, 아내의 몸이 남편에게도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2005년 리디머 장로교회 리더십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부관계는 "내가 전적으로, 완전히, 오직 당신에게만 속한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언약 갱신이라고요. 바울은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을 하나님의 선물로, 결혼 언약의 표현으로 봅니다. 이어서 바울은 말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다만 기도를 위해 두 사람이 합의하여 잠시 절제하는 것은 예외라고. 그리고 그 이후에는 반드시 다시 함께하라. 왜냐하면 절제의 기간이 길어지면 사탄이 틈을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고는 금욕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부부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독신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즉시 덧붙입니다. 각자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다고. 캘빈은 CCEL에 수록된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 점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바울은 독신의 은사를 소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기준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겸손함의 독특한 표시"라고 칼빈은 썼습니다. 독신의 은사가 없는 사람에게 독신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개혁신학 관점 2부 · 독신은 위로상이 아닙니다 · Singleness Is Not a Consolation Prize (vv. 8–9)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9 — 개역개정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마치 결혼이 차선책인 것처럼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반대의 독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결혼의 은사를 주셨다면,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 위험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독신자들을 "아직 결혼 못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바울의 신학과 충돌합니다. 독신은 2등 시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독신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결혼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어느 쪽도 구원하지 못하고, 어느 쪽도 당신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정의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3부 · 복음이 결혼을 붙듭니다 · The Gospel Holds the Marriage (vv. 10–16) 10절부터 바울은 이미 결혼한 사람들에게 방향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바울은 드물게 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의 개인적 의견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마가복음 10장, 마태복음 5장과 19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혼이 로마 문화와 유대 문화 모두에서 비교적 용이했던 시대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낯선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린도전서 7:14 — 개역개정 이 구절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불신 배우자가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섬세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배우자 한 명이 그 가정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권 안에 가져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은 언약 공동체와의 접촉 가운데 자라납니다. 이것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언약적 양육'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구원은 자동이 아니지만, 은혜의 수단이 그 가정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 배우자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얽매일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5절)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이것은 희망의 언어입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그 불확실성 안에서도 신실하게 머무는 것 — 그것이 복음의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결혼도 독신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복음의 자유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코칭 질문 Status  ·  현재 상태 지금 나의 관계 상태 — 결혼이든 독신이든 — 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그 마음속에 바울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가 있지는 않습니까? Surrender  ·  내어드림 결혼 안에서, 혹은 독신의 삶 안에서, 어떤 부분을 아직 하나님께, 혹은 나의 사람에게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를 내어드린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Sanctification  ·  거룩한 영향력 바울은 믿는 배우자 한 명이 그 가정에 은혜의 통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내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 가족이든 동료든 — 에게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까?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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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Jun 13

    두 세계 사이에서 · Between Two Worlds

    댓글 창 두 세계 사이에서 · Between Two Worlds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의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있습니다. 옌스 카스트로프(Jens Castrop,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그는 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더 어렵고 자신의 정체성에 더 부합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A young man born in Germany chose to wear the jersey of Korea. Jens Castrop — 옌스 카스트로프 — plays as a midfielder for Borussia Mönchengladbach in the Bundesliga. Despite the pressure to stay, he made the harder choice — the one more true to who he is. 카스트로프는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뒤셀도르프에 태어났습니다. 유럽 최대 규모의 한인 공동체 중 하나가 뿌리내린 바로 그 도시에서. 그는 U-16부터 U-21까지 독일 유소년 대표팀을 모두 거쳤습니다. 더 쉬운 길은 독일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25년 8월, FIFA는 그의 국적 변경 신청을 승인했습니다. 그해 9월, 그는 미국을 상대로 한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2026년 5월,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 태생 혼혈 월드컵 대표팀 선수가 되었습니다. Castrop was born in Düsseldorf to a German father and a Korean mother — in a city that happens to be home to one of Europe's largest Korean communities. He represented Germany at every youth level from U-16 through U-21. The easier path was to stay. Instead, in August 2025, FIFA approved his switch of international allegiance to South Korea. In September 2025, he made his senior debut in a 2–0 win over the United States. In May 2026, he became the first foreign-born, mixed-heritage player ever selected for a South Korean World Cup squad. 홍명보 감독은 그를 선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빛에서 불꽃을 보았습니다." 통계가 아닙니다. 전술적 포지션이 아닙니다. 불꽃입니다. South Korea's coach Hong Myung-bo described what he saw when he called Castrop up: "They saw the fire in my eyes." Not statistics. Not tactical position. Fire. 카스트로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한국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가치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이제: "이제는 정말 온전한 한국인이 된 거 같다." Castrop himself says: "My mother taught me from a young age to stay close to Korean culture, traditions, and values." And now: "I feel like I've truly become a full Korean." 성경은 옌스 카스트로프 같은 사람들을 위한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증인들은 완벽히 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이픈의 사람들 — 있었던 것과 약속된 것 사이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전당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룻은 이방의 땅으로 건너가 자기 것이 아닌 백성에게 충성을 선언했습니다. Scripture has a category for people like Jens Castrop. The great cloud of witnesses in Hebrews 11 is not a hall of the perfectly settled. It is a gallery of the in-between — people who lived with one foot in what was, and one foot stretched toward what was promised. Abraham left Ur. Ruth crossed the border into a foreign land and pledged allegiance to a people not her own.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3 (개역개정) "These all died in faith, not having received the things promised, but having seen them and greeted them from afar, and having acknowledged that they were strangers and exiles on the earth." — Hebrews 11:13 (ESV) 한국계 미국인인 우리에게, 그리고 양문화 사이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들에게, 이것은 시적 은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화요일 아침입니다. 학교 점심 식탁에서 "근데 넌 진짜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을 받는 그 순간입니다. 친척 모임에서 억양이 조금 이상하다는 눈빛을 받는 순간이고, 미국 직장에서 얼굴이 예상과 다르다는 침묵 속의 당혹감을 감지하는 순간입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붙잡는 것 — 그것은 지치는 일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도 합니다. For those of us who are Korean-American — and for our children who grow up as third-culture individuals — this is not a poetic metaphor. It is Tuesday morning. It is the question at the school lunch table: "But where are you really from?" It is the Korean family reunion where your accent is slightly off, and the American workplace where your face does not match the unspoken expectation. Holding two worlds at once is exhausting and beautiful.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은 나그네의 삶을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솔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1:16 (개역개정) But Hebrews 11 does not romanticize the exile's life. It is honest about the loss. And at the same time it says this: "But as it is, they desire a better country, that is, 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for them a city." — Hebrews 11:16 (ESV) 최종적인 소속은 어떤 여권도 줄 수 없고, 어떤 FIFA 판결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중 언어의 마음, 이중 문화의 직관, 세계들을 번역하는 능력 — 이것들은 짐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소명입니다. The final belonging is the one no passport can grant and no FIFA ruling can revoke. The bilingual mind, the bicultural intuition, the capacity to translate not just words but entire worlds — these are not burdens. They are callings. 이번 에피소드의 묵상 질문 · Reflection Questions 당신의 삶에서 두 세계 사이에 있다고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 문화적으로, 직업적으로, 신앙적으로? 그 '사이'를 당신은 주로 짐으로 경험합니까, 아니면 선물로 경험합니까?  Where in your life do you feel caught between two worlds — culturally, professionally, spiritually? Do you mostly experience that "in-between" as a burden, or as a gift?카스트로프의 어머니는 이방 땅에서 아들에게 문화와 전통과 가치관을 심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씨앗을 심어준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심고 있는 씨앗은 무엇입니까?  Castrop's mother planted culture, tradition, and values in her son in a foreign land. Is there someone who planted that kind of seed in you? Or what seed are you planting in someone else right now?히브리서 11장의 나그네들은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어떤 '지상의 소속'이 최종적인 소속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까?  The exiles of Hebrews 11 were not looking for an earthly home — they were seeking a heavenly one. In your own life, what earthly belonging is quietly trying to take the place of final belonging?전체 글과 참고문헌은 쥬빌리 코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The full article with all references is available at the Jubilee Coach homepage.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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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Jun 12

    고린도전서 6장

    댓글 창 바울은 성도 간의 문제를 불의한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성도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존귀한 신분인데, 교회 내의 작은 일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에 호소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형제끼리 고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패배한 것이며,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강조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어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6:1–2) 교회 안 분쟁을 해결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들끼리의 문제는 십자가로 해결해야 합니다. 사랑의 원리, 용서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해결해야 합니다. 잘잘못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그친다면 세상 법정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지체를 세워 주고, 부족함을 감수해 주는 것이 십자가 원리입니다. 신상필벌이 십자가 정의의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정의입니다. 불의한 일에 눈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 법정에 의해 세워진 정의가 오히려 십자가의 관점에서는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유한 교인들이 세상 법정에서 약한 형제들을 억압하고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말씀을 떠난 정의, 사랑을 잃은 정의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용서 없는 정의는 은혜를 모르는 정의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6:11) “모든 것이 가하다!” 고린도의 일부 성도들이 내건 구호입니다. 신령한 자신들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은 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고 향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방종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사람들은 예수께 복종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신 말씀을 따라 삽니다. 자신의 자유만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양도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리가 주는 참 자유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6:12).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힌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의 구호입니다. 음식이 식욕 해소를 위한 것이듯, 성욕도 해소해야 할 생리현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배와 음식은 사라지지만 몸에 행한 음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몸은 내 것이기 전에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영광대로 써야 합니다. 부활의 몸이 되게 하실 것이니 이 몸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몸을 외면한 채 구원받기에 합당한 영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와 창기의 지체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몸을 더럽히는 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요, 우리 몸은 피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니, 몸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더럽히는 죄가 됩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영광,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6:19-20) 바울이 이 장에서 여섯 번이나 묻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무지를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데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선언된 사실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씻겼습니다. 거룩해졌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 선언으로부터 살아가십시오.쥬빌리 코칭 질문 Coach Brian’s Questions 나는 지금 어떤 분쟁이나 억울함을 붙들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원리 — 사랑으로 역사하는 정의 — 로 그 문제를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이, 오늘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을 어떻게 바꿉니까?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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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