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운 목사의 5분 묵상

하천운 목사

자유교회 하천운 목사의 5분 묵상, 주일 설교를 나눕니다.

  1. ١١‏/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5) 복음이 역사하면 안 되는 일도 있다 - 사도행전 19장 21절-41절 /하천운

    성경 : 사도행전 19장 21절 – 41절 제목 : (사동행전 55) 복음이 역사하면 안 되는 일도 있다. 마케팅의 법칙 중 ‘선점의 법칙’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은 상품을 만들어 그 상품에 대한 선점을 확보하면 기적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지 않는 한 그 상품은 항상 판매율 수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최초의 콜라로 시장에 들어온 후 많은 후발 업체가 뛰어들었지만 그 수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는 ‘선점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초강력 후발 상품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라는 여신을 섬기는 도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을 만들어 섬길 정도로 아데미 숭배가 융성했던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라는 이상한 대머리 아저씨가 들어와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자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9절 마술을 행하던 이들이 자기 밥벌이 수단인 마술 비법서를 불사르게 되는데 그 값이 현 시세로 75억 원어치에 이릅니다. 또한 사도행전 19장 24절에서 27절을 보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재벌로 만들어 주었던 아데미 모형 신상이 팔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확산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사라지는 영역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곳에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곳에는 부정, 타락, 우상, 정욕이 사라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구약의 느헤미야 시대의 부흥은 말씀의 확산으로 인해 사라지는 타락 문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느헤미야 8 장의 수문 앞 광장의 영적 부흥 이후 ‘이방 결혼’ 폐지 등 말씀과 상충되는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1903년 부흥이 일어난 웨일즈에서는 술집이 문을 닫고 감옥이 텅 비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평양 대부흥이 있던 1907년 이후 기독교 상인들은 계량을 속여 판 것을 회개하고 삭개오처럼 자진 변상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주일에는 예배만 드리기로 결심하자 그 여파로 주일이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의 기독교 인구는 10%에 불과했지만 그 10%가 일요일에 안식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복음은 120여 년 만에 1000만이라는 경이적인 확산을 일궈냈습니다. 세계에서 대형교회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40 년은 부흥이었는지 되묻게 됩니다. 크리스천의 증가 시기와 정치의 부정부패, 부자의 갑질, 룸살롱, 충동 살인, 이혼율, 원조교제, 아동학대, 입시 비리 등도 덩달아 증가하였습니다. 복음이 확산되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이 성경의 증언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어둠이 짙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에베소의 크리스천은 before/after가 선명했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마술 책으로 돈을 벌었지만 예수 믿은 이후에는 마술 책을 버렸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아데미 우상을 모셨지만 예수 믿은 이후에는 아데미 신상을 내던졌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심어진 참 복음은 어둠을 깨닫고, 더러움을 보며, 악취를 맡는 영감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과감히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죽음을 결행합니다. 썩어져가는 악습의 옛사람을 과감히 버리고 의와 진리와 거룩의 옷을 입은 새사람이 사는 곳에 어둠은 발붙일 수 없습니다. 우상 제작 및 판매자 데메드리오는 복음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예수 복음이 역사하면 되는 일만 있는 것 아닙니다.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난 일은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로 돈을 벌고, 복을 받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복음이 주는 은총은 거룩에 담겨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은 피하고,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일에 전념하는 현장의 영성이 충만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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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٠٩‏/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4) 무능력을 들키면 무시당한다 - 사도행전 19장 8절-20절

    성경 : 사도행전 19장 8절 – 20절 제목 : 무능력을 들키면 무시당한다.. 에베소에서의 바울 사역은 강력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9장 11절, 12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복음의 현장에 초자연적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지켜보던 이들 중에 마술을 하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눈으로 볼 때 신비한 현상을 일으키는 주술사 같은 유대인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악귀를 쫓아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행전 18장 15절, 16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 악귀 드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니라” 귀신에게 무시당하고 제압 당하는 굴욕을 겪습니다. 간혹 크리스천에게서 유대 마술사 같은 모습을 보곤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별것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을 주문처럼 여기며 믿음 없이 행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어떤 이는 귀신이 무섭다며 피합니다. 27살 전도사 시절 성도가 귀신들린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적 있습니다. 여전도사님과 부목사님이 전도사들에게 같이 가겠냐고 할 때 슬슬 피합니다. 나는 기꺼이 가겠다며 따라가서 귀신의 집중적인 침 세례를 받아 가며 온몸을 잡고 기도로 제압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공수부대에서 전도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32살의 신참 목사였습니다. 거기다가 얼굴도 동안이어서 더 어려 보였습니다. 부대 목사님이 반갑게 우리 선교팀을 맞아 주었습니다. 어린 목사를 본 부대 담임목사님은 실망한 듯했습니다. 나와 부대 복음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말하기를 “그냥 열심히 전해주시기만 하십시오. 일주일 전에도 모 대형교회 찬양팀이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여튼 우리는 영접과 무관하게 복음을 많이 듣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왠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나와 우리 선교팀의 영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리허설이고 뭐고 다 미루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예배 시작 전까지 예배당 뒤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힘을 실어주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선교되게 하소서” 그리고 시작된 공연과 설교. 형용할 수 없는 힘들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얼굴도 비치지 않았던 교회 안수 집사 네 분이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다과를 들면서 한 안수 집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역대 선교 집회 중 가장 많은 영접자가 나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십자가의 능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교팀이 떠날 때까지 배웅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5절을 보라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되 너희는 누구냐?” 바울은 알되 너는 모르겠다. 많은 크리스천이 무시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무시를 핍박이라는 포장지로 덮어 변명하기도 합니다. 무시란 크리스천의 존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입니다. 후배 목회자에게 설교할 때 처음 하는 말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말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바빠서 설교 준비를 못 했습니다” “처음이라 설교가 많이 부족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과연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정말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배려할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약하고 무능함은 주 안에서나 포용되고 덮어주는 것이지 옛사람이 살아있는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약하고 무능함을 먹잇감으로 여겨 달려듭니다. “설교를 준비 못 했습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미 말씀 들으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말씀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사도행전 19장 11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신자의 온몸은 하나님의 능력이 표출되는 통로로 쓰임 받을 때 권위자가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어린 사역자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받지 못하게 하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즉 권위 있는 사역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권위가 세워지는 방식으로 다음 4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모든 일에 본이 되라. 디모데전서 4장 12절. 둘째, 자신의 사명에 전력을 다하라. 디모데전서 4장 13절.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디모데전서 4장 14절. 넷째, 성장하라. 디모데전서 4장 15절. 요한 일서 5장 4절, 5절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아멘.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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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٠٨‏/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3)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선물 -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7절 /하천운

    성경 : 사도행전 18장 24절 – 19장 7절 제목 : (사도행전 53)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 사도행전 18장 24절, 25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사도행전 19장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하고,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도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아볼로가 살던 알렉산드리아는 당시에 제2의 도시였고, 60만 권 이상의 도서를 소장한 도서관이 있을 정도로 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흩어진 유대인에게 매우 너그러운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경을 제작하여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할 정도로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었고, 필로와 같은 종교철학자의 효시를 배출할 정도로 철학의 깊이도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는 성경을 관통하는 메시야 사상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사람을 통해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고, 그가 예언한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통해 확신을 얻고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각국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화되면서 전도 없이도 예수를 아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볼로처럼 학문적으로 예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대 문헌을 추적하면서 예수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다는 책을 출판한 사람도 있습니다. 현대의 유대인중에는 예수를 배교자로 보기보다는 훌륭한 랍비였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르크시즘은 예수를 공산주의자의 창시자로 보기도 합니다. ‘슈퍼스타 크라이스트’라는 뮤지컬에서는 예수는 인기인으로 그려집니다. 신앙인이 아닌 이에게 예수는 연구 대상이고, 윤리 교사이며, 모델이 됩니다. 성경은 독학으로 얻는 아볼로의 예수 지식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사도행전 18장 26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대체 아볼로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답은 사도행전 18장 27절에 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예수 십자가의 은혜의 사건을 몰랐던 아볼로의 가르침은 감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에 담긴 은혜를 깨달은 뒤에는 그가 누린 은혜를 끼칠 수 있었습니다. 은혜가 빠진 예수에 대한 지식은 절대 무지와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시고, 나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은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요구합니다. 거기까지만 알면 결국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게 되고, 예수가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크리스천을 보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깊이를 자신의 삶을 통해 평가하려고 합니다. 기도 많이 한 주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떳떳합니다. 선행을 하기라도 했으면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기도 응답도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주의적 접근입니다. 은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없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곧 은혜의 역사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죄에 대해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이요, 의에 대해 예수님의 살아남은 곧 나의 살아남으로 믿어지는 것.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결국 아볼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학문의 대상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8절을 보면 유대인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있게 증언”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 앞에 관사를 붙이고 있다.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야)이다”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학자에서 신자로 변화시킵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계 각국 전문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성육신인가? 인간으로의 현현 타 종교에도 있다. 부활인가? 죽은 자의 환생 기사 타 종교에도 있다.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C.S.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토론의 주제가 뭡니까?” “전 세계 종교 중 기독교만의 기여가 무엇인지 찾고 있었소” 루이스가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일시 : 2018년 10월 9일 자유 설교 : 하천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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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٠٤‏/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2) 특별한 문제는 특별하게 풀어야 한다 - 사도행전 18장 18정-23절 /하천운

    성경 : 사도행전 18장 18절 – 23절 제목 : (사도신경 52) 특별한 문제는 특별하게 풀어야 한다.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은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바울에게 고린도 지역은 힘든 사역지였습니다. 유대인의 강한 반발과 소송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고, 바른 정치인 갈리오의 판결 덕분에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이 항상 이렇습니다. 문제, 불안한 상황일 때는 떠나지 않습니다. 온 몸으로 동역자와 함께 그 문제를 안고 씨름합니다. 그리고 이제 해결의 혜택을 누릴 안정이 오면 또 다른 사역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른 사역지 에베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0절, 21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 환영의 분위기 있습니다. 그러나 - 허락하지 아니하고 /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바울은 길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개척하며 온 몸으로 길을 열고 우리에게 그 길을 선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주의 길을 닦고 여는 인생을 걸어갔습니다. 안정을 선물하고 또 다른 미지에 복음의 평안을 여는 걸음. 바울의 걸음 뒤에는 시온의 대로가 펼쳐지고, 바울의 걸음 앞에는 험한 돌무더기가 쌓여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주 예수의 힘으로 돌을 치워 길을 닦습니다. 수평이동하는 교인 중 일부는 특정 사익을 위해 규모가 작은 교회로 옮긴다고 합니다. 장로, 권사가 되고 싶은데 규모가 크고, 자리가 잡힌 교회에는 쉽게 장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일부러 작은 교회로 옮겨 몇 년간 열심을 다 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얼마 안 지나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 이들에게는 책임 의식 없는 주인 행세에 빠집니다.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책임지기 보다 책임 전가 대상을 찾거나 아니면 장로 타이틀을 신분 증명서로 삼아 조금 더 큰 교회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잘 위장해서 옮긴다고 합니다. 사회에서는 자기를 장로, 권사로 소개하며 우쭐거리구요.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도 교회의 지분을 나눠 갖습니다. 교회로 부르심은 교회를 통해 주시는 복 뿐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세우게 하심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 못났다고 버리지 않듯, 자녀가 부모의 늙음을 외면하지 않듯. 교회가 가족이라면 힘들 때 더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합심으로 구할 때 주의 강한 손과 편 팔의 기적을 맛볼 것입니다. 길 닦는 신앙, 길 여는 신앙의 결심으로 교회를 평안하여 든든히 세우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18장 23절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것 같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은 머리를 깎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어떤 목적을 두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한 것이지요.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과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의 기간을 충실히 지키고 다시 보통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특별한 상황일 때는 특별한 결단도 필요합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신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우여곡절이 존재합니다. 더 심한 고난, 더 중한 결정, 더 아픈 질병, 더 격한 슬픔, 더 높은 사명이 돌진합니다. 평소와 다른 상황을 평소와 같은 반응으로 뚫을 수 없습니다. 삽으로 흙을 파다 돌을 만나면 곡괭이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특별하다 여겨질 때 특별한 영적 반응이 필요합니다. 여자가 심경의 변화와 결심이 있을 때 머리를 자르듯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새로운 학년을 맞이할 때, 불경기가 닥칠 때 하나님 앞에 특별한 마음을 다지고, 간절히 부르짖어야겠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특별한 결단의 노고를 지켜나갈 때 우리도 언젠가 바울처럼 다시 머리를 자르고 감사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일시 : 2018년 10월 5일 설교 : 하천운 목사 성경 : 사도행전 18장 18절 - 23절 제목 : (사도행전 52) 특별한 문제는 특별하게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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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٠٢‏/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1) 착한 사람 - 사도행전 18장 12절-17절 / 하천운

    성경 : 사도행전 18장 12절 – 17절 제목 : (사도행전 51) 착한 사람 한국인에게는 묘한 편견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착함과 우둔함을 같은 개념으로 여깁니다. 착한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고 순진한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이용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어머니들은 “아이가 참 착하게 생긴 것 같다”고 말하면 칭찬이 아니라 욕으로 듣는다고 합니다. 이 험한 세상 순진하면 못산다고 여겨서 영악?하게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착한 사람은 세상의 먹잇감이며 지혜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편견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착한 정치인이 등장합니다. 아가야의 총독인 갈리오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면서 최고의 철학자 세네카의 형이었습니다. 당시 문헌을 통해 알려진 갈리오의 성품은 한 마디로 착함 그 자체였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착한 사람이었던 갈리오가 로마의 험난한 정치 세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아주 훌륭히 잘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착함이 어리석음과 등호가 아니다. 사도행전 18장 12절. 갈리오가 총독이었을 때 유대인이 일제히 바울을 로마 법정에 송사하였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갈리오의 착함을 단호하지 못함으로 착각하고 이용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대규모 군중이 몰려오면 민요가 날까 두려워 자신의 뜻을 수용할 것이라는 몇 수 앞을 내다본 시위였는지 모릅니다. 갈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행전 18장 14절,15절. “나쁜 일을 했으면 수용하겠으나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 스스로 처리하라” 로마법으로 바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은 바울에게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법적 절차 없이 형을 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총독 갈리오의 착함을 사용하여 바울 사도를 보호하셨습니다. 착함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싫다는 소리 못하고 그냥 당하기만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착함이 아니고 소심하고 극단적인 내성 성격 그리고 겁장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갈리오를 통해 ‘착함’에 대해 이렇게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착함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유대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법을 죽이는 쪽으로 이용하려 했다. 반면 갈리오는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살리는 쪽으로 법을 해석 적용하려 했습니다. 모질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둘째, 착함이란 원칙을 지키는 태도입니다. 갈리오는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8장 14절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법대로 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칙을 지키면 냉정하고, 딱딱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주의야 말로 따뜻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법은 약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법규가 많습니다. 그 법규를 제대로 실행하고, 판사 고유 권한으로 약자 우선의 유권 해석만 제대로 내려도 백성들은 감사하고, 억울함을 풀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건 원칙을 지킨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바울 자신은 타지에서 열린 재판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억울하게 법정에 서는 구나 생각하며 침울했을 것입니다. 반면 고린도의 유대인은 갈리오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법정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전장이라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뿔싸. 복병이 있었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대인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살며 도움은 의외의 사람으로부터 올 때가 대부분이었습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자력이 아니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마음을 착하게 먹고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었습니다. 고레스가 왜 마음이 착하게 바뀌었는지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저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변화시키사" 그것이 답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이 하만의 궤계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십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불면에 시달립니다. 하도 잠이 안와 왕의 역대 왕들의 일기 좀 가져와라 해서 밤중에 잠 안자고 일기를 봅니다. 이해가 됩니까? 심심해서 쭉 읽다가 과거 모르드개의 행적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충신이구나.’ 그래서 상황이 역전되어 모르드개가 죽어야 되는 그 자리에서 하만이 죽게 됩니다. 그날따라 왜 불면인지, 그날따라 지겨운 역대 일기를 읽으려 했는지 상식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답은 하나님이 역사하셨다입니다. 하나님의 물밑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착한 사람 만나게 하시고, 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괜히 호의를 베풀고, 상황을 역전시키실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일시 : 2018년 10월 3일 설교 : 하천운 목사 성경 : 사도행전 18장 12절 - 17절 제목 ; (사도행전 51) 착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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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٠١‏/١٠‏/٢٠١٨

    5분묵상(사도행전50) 영적 침체 극복법 - 사도행전 18장 1절-11절 / 하천운 목사

    성경 ; 사도행전 18장 1절 - 11절 제목 : (사도행전 50) 영적 침체 극복법. 바울은 원래 전문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먹고, 자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복음에 투자하며 지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장 3절, 4절을 보면 고린도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주중에는 천막업에 종사하며 생계에 힘쓰고, 안식일에만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일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문 전도자인 바울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계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바울 주변 또는 바울 자신의 심경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바울도 사람인지라 환경, 사역의 결과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침체, 회의감 없는 신앙은 어쩌면 거짓 신앙인지 모릅니다. 사역에 열매가 없을 때마다 침울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되묻곤 했습니다. “주님은 정말 나를 목사로 불렀는가?” 엘리야는 바알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 등등한 아합의 세력을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회적으로 실망감을 표출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취하소서!” 신자는 주님의 실존을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명자로 부르신 것인가?” “주님은 나를 지켜보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삶에 동참하고 계시는가?”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사랑받는다면 왜 똑같이 기도하는데 영민의 삶은 형통한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이런 항의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극복입니다. 바울이 이 영적 침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대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격려자를 만나 침체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을 방문하러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바울이 하나님에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격려자라고 다 같은 격려자는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은 격려자이기보다 비난자였습니다. 상처에 소금 뿌리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의 심령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은 교제권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사귀느냐에 따라 신앙의 성격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또한 평소에 사귀던 친구들이 누구인가?를 보면 장래에 그 친구들로 인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돈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돈을 다 탕진한 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였고, 그것조차 사람들이 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는 교제권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습니다. 내가 약하게 될 때 비로소 나의 평소 교제권이 검증 받게 됩니다. 자유교회에서 실라를 만나고, 디모데를 만나 힘을 얻는 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격려를 받았다. 사도행전 18장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나님은 사명자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신앙인의 모든 염려, 침울, 불안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해결됩니다. 엘리야도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신앙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앙의 침체는 기도의 무능으로 연결됩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도조차 싫어집니다. 침체, 무능, 회의가 들 때 할 일은 성경을 붙잡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인류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시편을 읽으면서 시인들도 나와 똑같은 신앙의 갈등을 겪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가운데서 나를 어루만지는 주의 말씀이 강하게 임재할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대항한 독일의 어느 목사님이 감옥에 수감되게 되었을 때 죽음과 고문의 두려움이 엄습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고,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65번 기록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365일 나를 지켜준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진정한 격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힘들때마다 사람을 기웃거리거나, 쾌락을 찾거나, 놀러다니거나, 아니면 일을 그만둠으로 해결하는 것은 한시적 해결책일 뿐입니다. 말씀에 파묻혀야 합니다. 일과 염려에 파묻히면 죽지만 성경에 파묻히면 소생합니다. 오늘 주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히 들리기를 축원합니다. 일시 :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설교 : 하천운 목사 성경 : 사도행전 18장 1절 - 11절 제목 : (사도행전 50) 영적 침체 극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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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교회 하천운 목사의 5분 묵상, 주일 설교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