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김형래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

  1. 1d ago

    [아침마다 지혜 #486] 11일 만에 걸어 나온 70세 등산객, 그가 남긴 질문

    미국 로열 아일랜드 조난 사건, 준비된 시니어를 살린 것과 위험에 빠뜨린 것   늪에 빠뜨린 것은 휴대전화 하나였습니다 지난 8월 말, 미국 미시간주 슈피리어호 한가운데에 있는 로열 아일랜드 국립공원에 70세의 크레이그 버그(Craig Berg) 씨가 홀로 들어섰습니다. 엔지니어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전년에도 같은 주의 피처드 록스 국립해안을 혼자 종주했던 경험 많은 등산객이었습니다. 이번 일주일 일정을 위해 그는 꼬박 1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성능 좋은 헤드램프를 새로 장만했고, 아내는 캠핑용 매트리스를 바꿔 주었으며, 휴대전화에는 등산 지도 앱을 내려받았습니다. 위성 통신이 가능한 휴대전화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준비는 충분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처음 사흘은 순조로웠습니다. 하루 평균 11킬로미터가량을 걸으며 예정한 야영지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흘째 되던 날, 표지가 뚜렷하지 않은 구간에서 길을 벗어난 그는 늪지대에 빠졌습니다. 옷과 배낭과 식량이 모두 젖었고, 벗겨진 등산화는 간신히 찾아냈습니다. 다만 휴대전화는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 536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섬에서, 그는 그 순간 외부와 이어진 유일한 끈을 잃었습니다. 그 뒤 11일은 생존의 시간이었습니다. 이틀에 한 끼꼴로 동결건조 식품을 아껴 먹었고, 버너 연료가 떨어진 뒤에는 연못 물과 빗물을 소독약으로 처리해 마셨습니다. 늪을 파서 고인 흙탕물을 받아 마신 날도 있었습니다. 지대가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를 찾아 눈에 잘 띄도록 주황색 텐트를 치고 주변 풀을 밟아 눕혔으며, 오래된 음악 재생기의 이어폰 선을 풀어 라디오 안테나를 만들어 인근 도시의 방송과 일기예보를 들었습니다.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이틀을 꼬박 쉬기도 했습니다. 열하루째 아침, 인근 호수에서 카약을 타던 두 사람이 그의 외침을 들었고, 곧 해안경비대 헬기가 그를 끌어올렸습니다. 병원에서는 저체온증 소견 외에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가 미숙했기 때문에 조난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1년을 공부했고, 장비를 갖추었으며, 공원 관리자의 경고까지 새겨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실족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이유는 안전 장치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와 위치 확인과 통신이 모두 휴대전화 한 대에 얹혀 있었으니, 그 한 대가 사라지자 남은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 자신도 구조된 뒤 예비 단말기나 별도의 위치 발신 장치를 챙기지 않은 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가족의 역할입니다. 연락이 끊긴 뒤 아내는 수색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당국에 더 넓은 수색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곳에서 끌어낸 불씨는 아내의 집요함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아내는 온라인에 떠돌던 억측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 혼자 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판단력을 의심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도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시니어의 모험은 곧잘 무모함으로 번역되지만, 준비된 도전과 무모함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가을 산,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소방청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산악사고 구조 건수는 모두 3만 2,210건으로 연평균 1만 736건에 이르렀고, 월별로는 단풍철인 10월이 4,416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원인으로는 일반 조난이 8,021건으로 가장 많고 실족과 추락이 7,575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길을 잃는 것이 곧 사고의 첫 번째 얼굴인 셈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쓸 만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행정안전부는 2023년 3월부터 주소정보누리집을 통해 자신이 선 자리의 국가지점번호를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가지점번호는 국토를 가로세로 10미터 간격으로 나누어 부여한 위치 표시 번호로, 주소가 없는 산지에서도 정확한 좌표 역할을 합니다. 등산로 곳곳에 세워진 국가지점번호판이나 다목적 위치표지판의 번호를 119에 알리면 구조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요체는 하나입니다. 산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안전 장치를 겹으로 두라는 것입니다.첫째, 산행 계획과 예상 하산 시각을 반드시 가족에게 남기고 연락이 끊겼을 때의 기준 시각을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둘째, 통신 수단을 하나에만 의존하지 말고 보조 배터리와 종이 지도, 호루라기와 비상용 보온 장비를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셋째, 정규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값싼 보험입니다. 경험과 판단력은 시니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입니다. 그 자산을 지키는 방법은 도전을 접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준비하고, 알리고, 겹으로 대비하는 일 말입니다. 열하루를 버텨 낸 한 시니어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도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의 안전은 지금 몇 겹입니까.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 2d ago

    [아침마다 지혜 #485] 영국의 청년을 위한 '내 집 마련 지원책', 내 집 마련 사다리(Housing Ladder)

    고금리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영국 청년층의 내 집 마련 여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은행들이 자기자본(디포짓)이 적은 젊은 대출자에게도 대출 자체는 내주고 있지만, 높은 금리로 인해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 상환 부담이 지나치게 커진 탓에 실제 주택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건설업계를 중심으로, 과거 시행되었던 정부 지원 제도를 새로운 형태로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런던의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의 주말판 렉스(Lex) 섹션이 9월 19일과 20일 자에서 소개한 정부 위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시행된 생애 첫 주택 구매자 대상 지분 대출 제도 '헬프 투 바이(Help to Buy)'는 비용 대비 매우 높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정부가 주택 가격의 일부를 지분 형태로 대출해줌으로써 청년층의 초기 자금 부담을 낮추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연구진은 시행 기간 동안 38만 7,000가구가 새 집에 입주할 수 있었고 이 가운데 절반은 이 제도가 없었다면 자력으로 주택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아울러 신축 주택 건설 물량도 함께 늘어나는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정책의 부수적 결과로 주택 개발사들의 이익률 상승도 뒤따랐습니다. 문제는 지금 영국 건설업계가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런던 증시 FTSE 100 지수에 속한 대형 건설사 6곳 가운데 올해 가장 좋은 실적을 낸 퍼시몬(Persimmon)조차 연초 이후 시가총액의 15퍼센트가 증발하였습니다. 정부가 도시계획법 개정과 주택 공급 확대를 약속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구매할 여력이 되는 소비자를 충분히 찾지 못해 다수의 개발사들이 신규 착공을 미루고 현금을 쥔 채 관망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출 문턱 자체는 낮아졌으나, 고금리로 인한 상환 부담이 여전히 실수요를 가로막는 구조적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에 따라 다음 달 발표될 예산안에 새로운 형태의 헬프 투 바이를 담는 방안이 건설업계와 정부 모두에게 손쉬운 해법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다만 재원 마련이 걸림돌입니다. 국채 금리 상승으로 영국 정부의 재정 여력이 이미 압박을 받고 있는 가운데, 과거 제도는 주택 소유자의 상환금을 감안하고도 총 290억 파운드(약 52조 6,200억 원)의 비용이 들었고, 정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는 정부가 매년 40억 파운드(약 7조 2,600억 원) 이상을 청년층 주택 구매 지원에 쏟아부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 주택건설협회(Home Builders Federation)는 지분 대출 비율을 기존보다 낮은 15퍼센트 수준으로 설계하고, 건설업체들이 제도 참여 대가로 수수료를 선납함으로써 정부의 재정 부담을 낮추는 절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고금리 국면에서 청년 세대의 내 집 마련이 벽에 부딪힌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디딤돌대출이나 특례보금자리론 같은 정책 금융 상품을 통해 실수요자의 초기 자금 부담을 낮추어 왔습니다만, 재원의 지속가능성과 형평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주택 사다리는 단순히 한 세대의 자산 형성 수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니어 세대가 젊은 시절 내 집 마련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음 세대에게도 같은 기회의 문이 열려 있어야 사회 전체의 안정과 세대 간 신뢰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시니어 세대를 부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오랜 경험을 통해 자산 형성과 가정의 가치를 체득한 사회적 자산으로 재인식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재정 건전성을 도외시한 채 무분별하게 지원 규모를 늘리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접근 가능한 주택 사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7월 노동당을 이끌고 총리에 취임한 앤디 번햄(Andy Burnham) 총리 역시 생활비 부담 완화와 주택 공급 확대를 국정 우선순위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재정 건전성이라는 합리적 기준과 청년층의 주거 안정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함께 지켜낼 수 있는 절충안이 다음 달 예산안에 담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3. 3d ago

    [아침마다 지혜 #484] 코딩은 여전히 유효한가 — 라즈베리 파이 창업자가 던진 질문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하리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정작 다음 세대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지시만 내리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코드를 작성해 주는 이른바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이 확산되면서 나온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작 초저가 컴퓨터 한 대로 전 세계 수천만 어린이에게 프로그래밍의 문을 열어준 당사자는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영국의 신용카드 크기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를 만든 에벤 업턴(Eben Upton, 48세) 창업자가 그 주인공입니다. 코딩은 여전히 유효한가 업턴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코딩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현대적 형태의 문해력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는 컴퓨터에 단순히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좁은 의미의 코딩과, 문제를 계산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사고 방식으로서의 프로그래밍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를 설계한 기업이나 정부에 무의식적으로 좌우될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당하게 된다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오랜 경구를 재차 인용했습니다. 업턴이 2008년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비영리 자선단체 라즈베리 파이 재단은 지난해 말까지 총 1억 1,200만 파운드(약 2,184억원)를 청소년 코딩 교육에 투입했습니다. 그 결과 230만 명의 학생이 코딩 클럽을 거쳤고, 25만 명 이상의 교사가 관련 훈련을 받았습니다. 최초 25파운드(약 4만9천원)에 불과했던 이 저가 컴퓨터가 촉발한 교육 운동은, 지난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지원자를 1,759명까지 끌어올려 합격률이 7%에 그치는 최고 인기 학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인공지능 버블에 대한 냉철한 시각 흥미로운 대목은 정작 첨단 기술 기업을 이끄는 업턴 자신이 실리콘밸리발 인공지능 낙관론에는 냉담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초지능 도래를 기정사실처럼 말하는 미국 빅테크 경영진들을 향해 다소 구세주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꼬집었습니다. 공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의 생산성 향상 곡선은 무한히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정체되는 S자형 곡선, 이른바 시그모이드(sigmoid)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진단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이 결코 넘어서지 못할 점근선(asymptote)으로 남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업턴은 오히려 기술이 정치 권력과 다시 결합하는 현상을 더 큰 위협으로 지목했습니다. 통제 불능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종시킬 확률을 뜻하는 이른바 파멸 확률(p(doom)) 논쟁에 대해, 그는 그 실체는 폭주하는 기계가 아니라 아마도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일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산업혁명 이래 영국이 세계에 남긴 유산은 상업과 정치 권력을 분리해 생활 수준을 끌어올린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실제로 그는 초기 중국에 의존하던 생산 라인을 로봇 공학을 활용해 영국 웨일스 지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reshoring)에 성공하며, 대량 생산은 반드시 저임금 국가에 맡겨야 한다는 통념도 함께 깨뜨렸습니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러한 사례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손자녀 세대의 교육 방향을 고민하는 시니어라면,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보다 사고력과 문해력의 기초를 다지는 교육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원칙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제조업 기반을 해외로 넘긴 뒤 좀처럼 되돌리지 못하는 우리 산업 현실에서, 로봇 공학을 통한 생산 기지의 국내 복귀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대목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기술이 소수 권력에 집중될 때 사회 질서와 안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오랜 세월 격변을 지켜봐 온 시니어 세대의 경험적 지혜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화려한 장밋빛 전망과 근거 없는 공포 모두를 경계하며 냉철한 사실에 기반해 판단하려는 업턴의 태도는,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거대한 기술 물결 앞에서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기보다, 검증된 원칙과 기초 역량을 굳건히 지키며 합리적 균형을 찾아가는 자세야말로 오늘의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지혜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4. 4d ago

    [아침마다 지혜 #483] 화려한 거리에 서서(Easy Street): 미국의 새로운 부유층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

    자수성가한 소상공인과 자영업 창업가들이 주도하는 미국 부의 지형 변화 미국에서 부(富)의 상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부유층이라 하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이나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창업자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 경제 매체들이 잇달아 조명하고 있는 새로운 부유층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라 미국 전역의 중소도시와 외곽 지역에서, 화려한 학력이나 거대한 벤처 자금 없이 지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실물 서비스를 제공하며 견고한 자산을 일군 소상공인과 자영업 창업가들입니다. 미국 언론은 이들을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Everywhere Millionaire)'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밀리어네어는 순자산 100만 달러(약 13억 4,000만 원, 2026년 9월 7일자 원/달러 환율 약 1,338원 적용) 이상을 보유한 사람을 뜻하는데, 이 계층이 이제 특정 대도시가 아니라 미국 어디에서나(Everywhere) 고르게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배관과 세차장에서 찾은 부의 공식 이들의 사업 영역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뚜렷합니다. 배관, 전기 공사, 냉난방시스템(HVAC) 설치, 세차장, 조경, 지역 물류와 정비업 등 누구나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생활 밀착형 업종이 대부분입니다. 최첨단 기술 산업에 비하면 겉보기에는 소박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경기 변동의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꾸준한 현금 흐름을 만들어내는 알짜 사업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휴 자본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디지털 마케팅과 체계적인 경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과거의 낡은 소상공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수익 사업체로 사업을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과시 대신 재투자, 중심 대신 지역 이들의 생활 방식 역시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값비싼 명품이나 과시형 소비 대신 사업에 대한 재투자, 지역 부동산 매입, 실용적인 자산 운용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이 주도해 온 정치·사회적 담론의 중심에 서기보다, 자신이 뿌리내린 지역 공동체 안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를 축적하는 방식뿐 아니라 부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기존 부유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소비자 맞춤형 자영업 부유층의 증가는 특정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미국 부의 무게중심을 전국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청년층의 취업난과 함께, 은퇴 이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시니어들의 창업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창업이라 하면 고위험 고수익을 좇는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이나 유행에 편승한 프랜차이즈 쪽으로 관심이 쏠린 경향이 있었습니다.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의 사례는 화려한 아이템보다 실질적인 수요가 존재하는 생활 밀착형 실물 산업에서도 충분히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특히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전문성과 신뢰,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온 시니어 세대야말로 이러한 실물 서비스 창업에서 남다른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면이라는 오래된 답 물론 하나의 성공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역 밀착형 서비스업 역시 초기 자본과 숙련된 기술, 오랜 시간에 걸친 신뢰 구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만큼, 손쉬운 성공의 지름길로 오인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분명합니다. 부는 화려한 간판이나 유행하는 산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과 실물 경제에 대한 우직한 헌신에서도 얼마든지 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부의 무게중심이 전국 각지의 평범한 지역 사회로 분산되는 이 흐름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성공의 토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습니다. 화려함보다 실속을, 유행보다 본질을 좇는 자수성가의 가치를 우리 사회도 진지하게 되새겨 볼 시점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5. 5d ago

    [아침마다 지혜 #482]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

    — 독일 중소기업 승계 위기가 던지는 경고 독일 중소기업(Mittelstand)계가 심각한 세대교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 독일 유력 일간지 디벨트(Die Welt)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독일 중소기업 네 곳 중 한 곳은 현재 경영진이 물러난 이후 가까운 시일 내 혹은 장기적으로 폐업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배경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7%는 자녀 세대의 가업 승계 의지 부족을 주된 이유로 꼽았으며, 거의 비슷한 비율의 응답자가 과도한 관료주의적 규제 부담 또한 문제로 지적하였습니다. 독일재건은행(KfW, 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이 발표한 '2025 중소기업 승계 모니터링' 보고서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줍니다. 2029년 말까지 은퇴를 계획하는 기업가는 56만 9,000명에 이르는 반면, 같은 기간 후계자를 찾고자 하는 중소기업은 54만 5,000곳에 그칠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물러나려는 소유주의 수가 이를 이어받으려는 후계자의 수를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이번 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본(Bonn) 소재 중소기업연구소(IfM, Institut für Mittelstandsforschung)의 분석 역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이 연구소에 따르면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승계할 가치가 있는 우량 가족기업 약 18만 6,000개가 세대교체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가운데 절반가량만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 계속 운영될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직원 인수(20%)나 외부 매각(30%)의 형태로 넘어갈 것으로 예측됩니다. 기관별로 구체적인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거대한 승계 공백이 다가오고 있다는 큰 흐름에는 이견이 없는 셈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크게 두 가지 구조적 흐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구구조의 변화입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를 맞이하는 시점에 뒤따르는 세대의 규모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유례없이 큰 규모의 세대교체가 짧은 기간에 몰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업을 잇기보다 자신만의 진로를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가족 승계 방식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독일 내 창업 활동 자체가 위축되면서 잠재적 인수자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이중고까지 겹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연령대별 창업 성향의 차이입니다. 청년층은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을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반면, 고령의 창업 희망자는 오히려 신규 창업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창업이 기존 기업 인수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창업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독일발 보고서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한국 역시 저출산과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중소기업 및 가업 승계 문제가 오랫동안 사회적 과제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정부가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통해 요건 완화와 지원 확대를 꾸준히 모색해 온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도적 지원만으로는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시니어 경영인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검증된 사업 노하우가 다음 세대에게 매력적인 자산으로 인식되도록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기업 인수는 신규 창업에 비해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과 숙련된 인력, 안정적인 거래처를 처음부터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 승계는 단순히 소유권이 넘어가는 사무적 절차가 아니라, 한 세대가 쌓아 올린 경험과 신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회적 자산의 계승 과정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평생에 걸쳐 축적한 전문성과 경영 노하우를 단절시키지 않고 온전히 물려줄 수 있도록, 세대 간 대립이 아닌 연대의 관점에서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공감대를 함께 마련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동시에 승계를 받는 다음 세대 역시 전통과 원칙이라는 안전판 위에서 합리적 기준에 따라 책임 있게 그 몫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앞선 세대가 지켜온 질서와 가치가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및 편집자 주] 본 칼럼은 2026년 9월 16일 자 독일 일간지 디벨트(Die Welt) 중소기업(Mittelstand) 섹션 14면에 실린 커스틴 슈비거(Kirsten Schwieger) 기자의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용된 수치는 KfW(독일재건은행)의 '2025 중소기업 승계 모니터링' 및 본(Bonn) 중소기업연구소(IfM)의 예측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원문 발행처의 통계를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6. 6d ago

    [아침마다 지혜 #481] 아흔일곱 수학자와 열다섯 소녀, 백 년 난제를 풀다

    은퇴는 쓸모의 끝이 아니라,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시간입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은 2026년 9월 16일 자 과학면에서 한 은퇴 수학자와 10대 제자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주인공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2004년 은퇴한 위상수학자 조안 버먼(Joan Birman) 박사와, 같은 동네에 살던 고등학생 바수다 바라트람(Vasudha Bharathram)입니다. 두 사람은 글래스고대학교의 타라 브렌들(Tara Brendle) 교수와 힘을 합쳐 약 1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난제를 해결했고, 지난 7월 그 결과를 논문으로 공개했습니다. 이야기는 2019년 여름의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92세였던 버먼 박사는 수학을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은퇴 뒤에도 이런 요청은 간간이 이어졌지만 박사는 선뜻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2년 전에 사별한 그는 세 자녀를 키운 교외의 집을 정리하고 대학 연구실과 가까운 아파트로 옮겨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는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닌 진심이 읽혔고, 며칠 뒤 그는 만나 보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수준의 추상대수학 교재를 먼저 구해 읽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해 7월, 막 15세가 된 바라트람이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로비에 나타났습니다. 세 살 때 인도로 갔다가 8학년 때 뉴욕으로 돌아온 학생이었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전공인 위상수학(topology)이 고정된 좌표에 묶이지 않고 늘어나고 휘어지는 도형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설명했고, 머리를 땋은 모양처럼 여러 가닥이 엇갈린 브레이드(braid)를 연필로 그려 보였습니다. 며칠 뒤 학생은 풀이 과정을 빼곡히 적은 노트 여러 장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겁 없이 덤빈 대담함도 놀라웠지만, 박사가 더 눈여겨본 것은 남다른 길로 정답에 이르는 독창성이었습니다. 글씨가 엉망이라는 스승의 지적을 받자 학생은 다음부터 답을 타자로 쳐 왔습니다. 버먼 박사 자신도 늦게 핀 학자였습니다. 세 자녀를 키우며 시간제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34세에 야간 수학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1968년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는 41세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거절당해도 문제 삼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브레이드 연구는 당시 침체된 분야로 여겨졌지만, 그는 이를 매듭 이론을 비롯한 여러 영역과 연결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84년 본 존스(Vaughan Jones)가 새로운 다항식을 발견했을 때 그 쓰임새를 확인하러 찾아간 곳도 버먼 박사의 연구실이었고, 존스는 훗날 필즈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도전한 문제는 부라우 표현(Burau representation)의 충실성 (faithfulness)입니다. 브레이드라는 도형을 다항식의 묶음으로 옮겨 적을 때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가닥이 3개 이하이면 정보가 온전히 보존되고 5개 이상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지만, 4가닥의 경우는 박사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오랫동안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박사는 교재를 함께 읽던 초기부터 이 문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직후 제자에게 이미 확립된 3가닥 사례부터 다시 살펴보라고 권했습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길에서 쓰러졌고 심장박동기 수술도 받았지만, 화상 수업과 공원 벤치에서의 만남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초기 작업을 검토한 밴더빌트대학교의 댄 마갈릿(Dan Margalit) 교수는 성공을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격려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옛 박사과정 제자인 브렌들 교수를 불러들였고, 브렌들 교수는 도식의 오류를 곧바로 짚어 내며 세 번째 동료가 되었습니다. 돌파구는 지난겨울에 열렸습니다. 4가닥 브레이드를 5가닥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해석하자, 정보 손실을 의심하게 만들던 다항식 항들의 상쇄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브렌들 교수는 이를 수학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사이 바라트람은 스승의 추천서를 들고 단 한 곳 지원한 프린스턴대학교에 진학했고, 지금은 대학원 첫해를 시작하며 4차원 공간의 매듭으로 연구를 넓히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세 가지를 읽습니다. 첫째, 성취는 요행이 아니라 축적에서 나옵니다. 백 년 난제가 풀린 것은 하루아침의 영감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수십 년 품어 온 질문과 제자가 7년 동안 이어 간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가르침에는 엄격함이 있어야 합니다. 박사는 어린 학생을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고, 어려운 교재를 주며 악필을 지적했고, 학생은 그 기준에 맞추려 애쓰며 자랐습니다.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곧 배려라고 여기는 요즘의 풍조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셋째, 은퇴는 물러남이 아닙니다. 박사는 대학까지 17달러(약 2만 4천 원, 1달러 1,400원 기준)의 택시비를 들여서라도 수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에 살기를 고집했고, 동료 학자는 97세인 그에게 수학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사례를 모든 시니어가 따라야 할 표준으로 삼을 일은 아닙니다. 건강과 형편은 저마다 다르고, 이번 논문도 앞으로 학계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평생 쌓은 경험과 기준은 다음 세대에게 건넬 때 비로소 제값을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자로 받아 함께 일하던 딸을 잃은 뒤 오랫동안 어린 제자 받기를 사양했던 박사가 다시 마음을 연 데에는 낯선 소녀의 진심 어린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니어에게도 그런 편지가 올 수 있습니다. 그때 귀찮다고 밀어내지 않고 생각해 보겠다고 답할 수 있는 준비가 품격 있는 노년의 출발점이라고 필자는 믿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7. Sep 16

    [아침마다 지혜 #480] 제임스 카메론 감독, '무모한 도박'은 어떻게 '확신의 결단'이 되었나

    - 영화 「타이타닉」이 남긴 교훈 1997년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은 극장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으로 꼽혔습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2026년 9월 14일자 지면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감수했던 위험과 결단의 과정을 다시 조명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를 오늘 다시 꺼내는 이유는, 세상의 우려 속에서도 끝내 결과로 증명해 낸 한 사람의 신념이 시니어 세대에게도 적지 않은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세트장에 담기지 않은 배 카메론 감독은 당시 이미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2」, 「어비스」 등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촬영 현장이 극도로 고되고, 배우와 스태프에게 결코 온화하지 않은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해저를 배경으로 한 「어비스」 촬영 때는 일부 배우가 익사 직전까지 몰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열정적인 다이버이자 해양 탐험가였던 그는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이야기를 거대한 규모로 스크린에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는 1991년 「터미네이터 2」에서 컴퓨터 그래픽 활용의 새 이정표를 세운 바 있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장면을 실제 세트와 물리적 특수효과로 구현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공간이었습니다. 기존 할리우드 스튜디오로는 여객선과 항구 시설, 수백 명이 등장하는 침몰 장면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론 감독은 제작사를 설득해 멕시코 해안의 부지 16헥타르를 사들이고 전용 스튜디오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곳에 실물 크기의 선박을 재현하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선체의 한쪽 면만 제작했습니다.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좌우를 뒤집어 촬영하는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침몰 장면을 위해서는 대형 유압 장치로 선미 세트를 들어 올려 가파르게 기울였고, 거대한 수조 안에 설치한 선실 세트는 촬영 한 번이면 파손되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단 한 번의 기회에 위험한 연기를 해내야 했습니다. 감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심 약 3,800미터 해저의 실제 난파선까지 직접 내려가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쏟아진 회의론 언론과 평론가, 제작사 간부들은 이 엄청난 투자가 과연 회수될 수 있을지 깊이 의심했습니다. 사고가 잇따른다는 촬영 소식이 전해지면서, 1963년 「클레오파트라」나 1980년 「천국의 문」처럼 영화사에 남을 실패작이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작품의 방향을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작사는 침몰 장면 중심의 재난 영화를 원했지만, 감독은 이를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이자 재난 대서사시로 설계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관객은 참혹한 침몰 장면을 꺼리고, 재난 영화를 기대한 관객은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잃을 것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기획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결과로 증명한 확신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이 영화는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당시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에 올랐습니다. 제작비는 약 2억 달러(약 2,800억 원)로 알려졌는데, 첫 개봉 당시 전 세계 흥행 수입은 약 18억 달러(약 2조 5,200억 원)를 넘어선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11개 부문을 휩쓸었고, 카메론 감독은 시상대에서 영화 속 명대사를 빌려 스스로를 세상의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무모함과 결단을 가르는 기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성공 신화로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카메론 감독의 도전이 무모함에 그치지 않은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바다를 누빈 경험, 이전 작품에서 검증된 기술적 역량, 그리고 선체를 절반만 짓는 식의 치밀한 비용 관리가 뒷받침되었습니다. 확신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축적된 실력과 준비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동시에 짚어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배우와 스태프가 위험에 노출된 현장은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거액의 투자를 앞두고 제작사가 제기한 우려 또한 조직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 견제였습니다. 위대한 성취는 한 사람의 신념과 이를 냉정하게 검증하는 목소리가 함께 있을 때 더욱 건강해집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시사점 오늘의 시니어 세대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건너온 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판단력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다만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 고집으로 굳어지지 않으려면, 근거를 갖추고, 준비를 철저히 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태도가 함께해야 합니다. 또한 반대 의견에 귀를 여는 유연함도 필요합니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도전 앞에서 주저할 때, 시니어 세대가 들려줄 수 있는 조언은 무작정 해 보라는 격려도,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만류도 아닐 것입니다. 준비된 도전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준비되지 않은 모험은 신중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지혜입니다. 침몰한 배를 다시 띄워 낸 한 감독의 이야기는, 책임과 준비라는 오래된 가치가 여전히 성공의 가장 튼튼한 토대임을 일깨워 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8. Sep 15

    [아침마다 지혜 #479] 3,085개의 안타가 증언한 한 시대

    히로시마의 섬광을 딛고 일어선 재일한국인 야구 전설 장훈 선생, 86세로 영면하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의 주인공 장훈(張勲 チャン・フン, 張本 勲 はりもと いさお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대기록 보유 선수들로 구성된 엘리트 단체인 골든 플레이어스 클럽(Golden Players Club)은 장훈 선생이 지난 수요일 별세했다고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를 요약하는 숫자는 단연 3,085라는 안타 기록입니다. 1980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았고, 은퇴 시점의 최종 기록인 3,085안타는 지금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로 남아 있습니다. 23년의 선수 생활 동안 504개의 홈런을 때렸고, 2,752경기에 출전했으며, 올스타에는 열여덟 차례 선정되었습니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은 과장된 수식이 아니라 기록이 스스로 붙여 준 이름이었습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 뒤에 놓인 출발점은 참혹했습니다. 장훈 선생은 1940년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오른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손의 운동 능력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절반을 잃은 소년이 훗날 일본 야구사에서 가장 정교한 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핍이 곧 운명의 선고는 아니라는 점을 웅변합니다. 그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왼손타자로 야구를 배웠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산 뒤편에 있어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파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누나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훈 선생은 그 며칠 동안 이어진 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야구를 시작한 소년은 중학교 시절 분명한 목표 하나를 품습니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23년 동안 그라운드에 세운 힘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바로 그 소박한 효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빠르게 증명했습니다.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해 115안타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이듬해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첫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본 1962년에는 처음으로 30홈런 시즌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왕정치) 선수와 한솥밥을 먹었고, 1980년 지금의 지바 롯데 마린스로 옮겨 통산 3,000안타와 500홈런을 완성한 뒤 1981년 방망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은퇴 후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름을 떨친 인기 야구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전과 핵군축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계기는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젊은 세대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TBS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섬광과 폭발, 그리고 의식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로서 나는 언젠가 원폭 후유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의 기록 뒤에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는 불안이 늘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만년의 그는 피폭 생존자들의 고령화를 자주 우려했고, '살아 있는 마지막 전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계속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증언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살 아이가 두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었습니다. 역사의 해석은 세대마다 갈릴 수 있으나, 겪은 사람이 남긴 목격담은 해석 이전의 자산입니다. 그 자산이 사라지면 후대는 판단할 재료조차 잃게 됩니다. 증언자가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억이 통째로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훈 선생의 생애는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접어 둔 일은 없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는 오른손을 잃은 채 왼손으로 3,085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건네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외환위기를 통과한 우리 세대 역시 저마다 증언자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한 세대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납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방망이를 들었고, 그 성실이 23년 동안 쌓여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 되었으며, 노년의 그는 그 이름값을 기억을 전하는 일에 썼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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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